[광화문에서/허문명]간첩 잡은 아파트

  • 입력 2006년 11월 10일 19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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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사회 무주택자들은 거의 집단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아파트 때문이다. 최근 한 달 사이 만나는 사람마다 연령과 성별을 넘어 이렇게 똑같은 주제(집값)를 화제로 삼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친구도 이념이 다르면 말을 끊는 세상인데, 좌우로 찢긴 나라가 ‘아파트’로 봉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며칠 전 대학동창 모임에서도 화제는 단연 아파트였다. 북한 핵이나 간첩사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안보 불감이나 무지가 아니라 ‘무시’였다. 아파트가 간첩을 잡은 격이라고나 할까.

집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있는 사람들은 겨우 작은 집 한 칸 마련했지만 대출이자 내느라 허리가 휜다고 한탄하면서도 앞으로 계속 오를지, 지금처럼 오를 때 팔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들이 분주했다.

하지만 그건 무주택자들의 ‘공포’에 비하면 사치였다.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에 청약했다가 떨어졌다는 선배는 “집 장만은 물 건너간 것 아니냐.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요즘 집값 폭등은 단지 부동산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투기할 돈도 없지만 나쁜 일이라며 관심 갖지 않고 열심히 한 푼 두 푼 모으면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집 한 칸은 마련하겠거니 하며 살아온 대다수 생활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에 4억 원짜리 아파트 전세를 살고 있는 친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건전한 의식을 가졌던 남편이 최근 한 달 동안 미쳐가는 모습을 보면서 ‘헛살았다’는 낭패감에 절망한다”고 토로했다. 친구의 남편은 정부중앙부처 과장급 공무원이니 대한민국 철밥통 직장인이다.

일중독이었던 그가 변한 건 한 달 전 집값 폭등이 불어 닥치면서부터다. ‘이렇게 살다간 결국 집 못 산다’는 불안으로 뒤척이던 그는 낮에 일은 뒷전이고 부동산 사이트를 파고들질 않나, 퇴근 후에는 아파트 보러 다니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도저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급기야 재테크에 젬병인 아내를 탓하며 결혼까지 후회한다면서 볶아대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남한테 퍼주기 잘해서 복 받아 잘살 것이라 짐작했던 친구 입에서 “열심히 살았는데 고작 이런 건가 싶어 허공에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자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인터넷 포털도 집값 논쟁으로 뜨겁다. ‘부모 잘 만나 10억 집 있는 친구 부럽다’는 제목의 글은 이런 내용이었다.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한 그 녀석, 부모님이 자기 명의로 재개발 아파트 사서 34평 브랜드 아파트 분양받았단다. 입주 때는 10억 원 정도 갈 것이라고 의기양양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전세 아파트라도 마련한 내가 자랑스러웠는데….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건가? 내가 재수가 없어 불공평한 세상에 태어난 건가?’

그의 글 밑에는 ‘부모 잘 만나는 게 최고 재테크’ ‘돈 없이 불행한 것보다 돈 갖고 불행한 게 낫다’는 ‘돈’ 예찬 댓글이 수두룩했다.

유산을 받았든 투기를 했든 돈만 있으면! 인기 지역 아파트 한 채만 있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라는 등식에 다들 공감하고 있었다. 이게 2006년 11월 ‘분배 우선, 평등 한국 사회’의 초상이다.

허문명 교육생활부 차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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