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자주와 사대의 진실

  • 입력 2006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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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대통령 선거는 ‘자주(自主)’와 ‘사대(事大)’의 대결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 포용정책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겠다고 밝힌 것도 ‘자주 장사’의 일환이다. 그는 지난 한글날에 세종의 정치철학을 ‘자주적 실용주의’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정말 ‘자주’와 ‘사대’의 대결구도로 간다면 ‘사대’는 백번을 싸워도 ‘자주’를 이길 수 없다.

‘자주’라는 구호가 국민에게 솔깃하게 들리는 것은 그다지 자랑할 게 없는 우리 역사에 대한 반감(反感) 때문이다. 반면에 ‘사대’는 오늘날 ‘강대국에 의존적인 태도’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굴욕적인 의미를 지닌다. 지난 대선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 대결에서 벌써 우파 진영이 지고 들어갔듯이 일단 사대로 몰리면 누구도 힘을 쓸 수 없다.

역사의 아픈 기억이 키우는 환상

“한국인에겐 사대주의의 피가 흐른다”고 단정한 것은 식민지 시대 일본의 어용학자들이었다. 최근 중국은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지방정부”라고 우리의 골을 질렀다. 그들의 의도가 딴 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수록 ‘자주’에 마음이 쏠린다. 고생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정서가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에서 어떤 행위가 자주였고, 사대였는지는 참으로 구분하기 힘들다. 예컨대 역사가들은 병자호란을 사대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라고 말한다. 명나라에 사대의 예(禮)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주전(主戰)파는 명나라에 의존적인 사대주의로 비친다. 그러나 외세에 맞서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자는 오늘날 ‘자주국방’의 시각으로 본다면 주전파들이야말로 자주적이었다. 그 결과는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내준 일대 참극으로 끝났다.

조선 왕조를 일으킨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回軍)을 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였다. 하지만 고려와 특수 관계에 있던 원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국가를 만들고 결과적으로 내부적 자주를 얻는 데 성공했으므로 사대와 자주 어느 쪽으로 봐야 할지 모호하다.

사대는 동아시아에서 국제질서 유지를 위한 현실적인 체제였다. 절대강국이었던 중국이 소국(小國)을 인(仁)으로 대하고 소국은 중국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上下) 관계임은 분명했지만 자유무역이 금지됐던 시절 교역의 창구로 활용됐고 나라가 위급할 때 원군을 요청하고 긴급 중재를 구하기도 했다. 국가로 살아남기 위해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짜놓은 외교 방식을 “선조들은 무능했다”며 질책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온당치 않다.

우리 선조들이 정말 마음먹고 사대를 했다면 오늘날 우리 민족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적극적 사대의 종착점은 결국 중국에 편입되는 것 아니겠는가. 중국에 대항했던 여러 세력은 대부분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한나라에 맞선 흉노족이나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일찌감치 지구상의 지도에서 사라졌다. 우리 선조들이 택한 생존 전략이 나름대로 타당했다는 증거다.

이처럼 간단치 않은 사대 문제를 자주와 대립시킨 건 후대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자주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대를 비판하기 위해 나중에 내세운 단어가 자주인 것이다.

유권자가 냉철하게 가려 내야

정치적 목적으로 자주와 사대의 편을 가르고, 훨씬 복잡다단해진 현대의 국제관계에 단순 적용해 막연한 자주의 환상을 부추기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강대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주체와 자주를 내세우는 데 ‘지존’인 북한이 수시로 중국과 러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자주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국민이 냉철한 눈으로 ‘사이비 자주’를 구별해 낼 수밖에 없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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