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나 떨고 있니

  • 입력 2006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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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를 ‘당했다’고 하는데 사기를 친 쪽만 비난할 일은 아니다. 한국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는 ‘사기는 심리전’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사기는 심리전이다. 말도 그럴싸하게 하고 기법도 정밀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상대방 마음의 ‘약한 부분’, 다시 말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착할 때 성공률이 높다. 가짜 명품 시계를 판 사장은 돈으로 자존심을 사고 싶은 명품족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든 경우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정 상태가 아닐 경우가 많다. 뭔가 갖지 못해, 혹은 얻지 못해 이것저것 분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때 사기범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대표적인 게 퇴직금 사기다. 퇴직자들 중에는 먹고살 걱정에다 직장이라는 울타리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작은 돈이나마 어떻게든 굴려야 한다고 조바심을 낸다. 사기범들은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퇴직자들의 성급한 마음을 파고든다.

사기범들은 상대의 ‘불안’을 노린다. 마음이 불안하면 리스크(위험) 관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불안’에 조급, 강박까지 겹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다.

이럴 땐, 기회가 와도 행동하지 못하고 무조건 몸을 웅크리는 극단적인 방어 심리가 나오는가 하면 에라, 모르겠다, 나도 한번 질러 보자는 ‘배 째라’ 심리가 나오기도 한다.

성인 4명 중 1명이 ‘불안’과 관련한 증상을 호소(대한불안의학회)하고 있으며 불안장애로 치료받은 사람이 지난해 무려 33만 명에 이른다(한나라당 안명옥 의원,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감 자료)고 한다. 가히 ‘불안의 시대’다.

오랜 경기 침체에 삶의 불가측성은 높아지고 난데없이 북한 핵까지 터졌으니 공감이 간다. 가진 사람은 빼앗길까 불안하고,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불안하다. 사업하는 사람은 망할까 불안하고, 직장 다니는 사람은 잘릴까 불안하다.

불안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욕망의 다른 이름이니 적당하면 삶의 에너지가 된다. 하지만 깊어지면 정신을 갉아먹는다. 불안한 사람들이 불안을 잊기 위해 뭔가(술, 종교, 도박, 사람 등)에 빠지고 집착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기도 한다. 요즘 일부 젊은이에게서 보이는 나태와 게으름은 불안한 장래를 생각해 봐야 어차피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으니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하겠다’는 일종의 메시지이다.

집착과 놓아 버림 중에 더 심각한 경우는 ‘집착’하는 경우다.

뭔가에 빠지면 생활에 쏟을 에너지가 부족해지니 사회적 패자가 되기 쉽다. 퍼뜩 정신이 나서 패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뭔가에 속았다는 울분이 치밀게 된다. 그런 울분이 심해지면 신흥 종교나 범죄, 혹은 반사회적인 정치 활동에 빠지게 된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욕설, 상시적으로 행해지는 타인에 대한 심리적 육체적 폭력, 극단적 좌파 이데올로기에 쉽게 정신을 의탁하는 것도 모두 포함된다.

불안은 관념이다.

자신을 통째로 흔드는 주범이 실은, 남이나 환경이 아니라 결국 내가 만든 마음, 착각, 오해라는 것을 깨닫는 길이 불안을 치유하는 첫걸음이다. 그래야 관념이 아닌 실체와 직면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허문명 교육생활부 차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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