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전효숙 카드’ 이젠 버리라

  • 입력 2006년 9월 17일 20시 41분


코멘트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이 헌법재판소 역할을 한다. 재판관 수는 우리 헌재처럼 9명이지만 임기는 6년인 우리와 달리 종신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도 연방대법원장과 판사 자리가 비게 되면 ‘코드인사’를 하려고 애쓴다. 공화당 정권은 보수파를, 민주당 정권은 진보파를 선호해 왔다. 1953년부터 16년간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얼 워런은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했다. 대통령선거 지원 공로도 참작됐다.

그러나 워런은 취임 후 진보 다수파를 구축해 ‘아이젠하워코드’를 완전히 버리고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 냈다. ‘인종분리 교육은 위헌’이라는 판결 등으로 ‘사법혁명’의 빛나는 역사를 주도했다. 아이젠하워는 “워런을 임명한 것은 일생일대의 가장 멍청한 실수”라고 후회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였던 밥 우드워드의 ‘형제들(The Brethren·대법원판사끼리 형제로 부르는 데서 따 온 제목)’에 나오는 얘기다.

전효숙 헌재 소장 후보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을까. 설혹 본인이 원했더라도 청와대가 3년간 재판관으로 재직한 전 씨에게 새 임기 6년을 더 보장하려고 한 점, 이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하여금 전화로 통보하게 한 점 등은 민주국가의 생명과도 같은 절차적 정당성을 위반한 것이다. 이는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의 희망처럼 국회 표결을 서둘러서 치유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리의 공백보다는 잘못된 선택이 재판 기피 사태 등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전 씨에게 ‘대통령코드’에서 해방돼 ‘헌법코드’로 재무장할 소신과 각오가 있느냐는 점이다. 국회의원들은 이 점을 우선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로봇 재판소장’을 낳게 된다면 국민과 헌법에 대한 배신행위가 될 것이다. 재판관 3년 경험자가 헌법상의 임기 문제에 눈을 감고 ‘대통령의 뜻’ 운운한 것은 ‘욕심’이 앞섰음을 말해 준다. 헌재 재판연구관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와 현 정권에서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어느 법조인은 한목소리로 양식과 소신의 결여로 파악했다.

전 씨는 다른 사람이 식사 초대를 했을 때는 가장 먼저 주문을 하고, 자신이 초대했을 때는 맨 마지막에 주문한다고 한다. 전자의 경우 싼 음식을 고르기 위해서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편하게 주문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는 얘기다. 그러나 헌재 소장은 인간성이나 성품만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6년 임기를 마치고 14일 재야로 돌아간 윤영철 씨는 퇴임사에서 그 자리의 어려움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념과 이해(利害)의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았다.”

전 씨는 청문회 답변을 통해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는 접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설득력 있는 뒷받침은 없다. “헌재의 결정은 재판관들이 합의해서 하는 것이니까 독단적으로 할 수 없다”는 막연한 답변이 고작이다. 외압(外壓)의 바람막이와 내부 조정자로서의 능력은 극히 의문스럽다. 헌재는 국가의 운영 방향과 현실 정치, 국민의 삶에 중대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헌재 구성 문제를 두고두고 걸림돌로 만들기보다는 노 대통령이 먼저 ‘전효숙 카드’를 버릴 때다.

육정수논설위원 sooy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