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서민을 도박장으로 데려간 정부

  • 입력 2006년 8월 22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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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저소득층을 위해 ‘방과 후 학교’를 시작한 것은 올해 신학기부터였다. ‘방과 후 학교’는 적은 비용만 받고 학교에서 ‘과외’를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면 빈곤 탈출이 어려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정권이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한다며 지난 3년간 떠들어 온 서울대 폐지, ‘내신 입시’ 도입 따위는 이들에게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소득에 따라 사교육비 지출 액수가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현실에서 아무리 입시 제도를 바꾼들 이들이 살고 있는 그늘에까지 햇볕이 들 수가 있을 것인가. 과외 받을 돈이 없어 학교가 끝나고 거리를 방황하는 한, 이들에게 미래는 없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머리 좋은 아이들은 불운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실제로 도움이 되는 현실적 대안이다. 노 정부는 저소득층을 위해 ‘방과 후 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입으로만 소외계층을 위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선전과 전술에 질질 끌려 다니고, ‘분배’니 ‘양극화 해소’니 하는 추상적 거대 담론에 매몰돼 헛발질만 해 온 것이다.

교육 문제는 ‘아마추어 정권’의 한계라고 치더라도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사행성 성인게임기 사태를 보면 서민을 도와주기는커녕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악의(惡意)가 번득인다. 성인오락실이란 곳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장소다. 실업 상태에 놓여 있거나 일이 안 풀리는 사람, 세상이 답답하고 불만스러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한국게임산업개발원이 작년 4월에 실시한 실태 조사에서도 주(主)이용객이 저소득층임이 확인됐다. 오락실 이용자의 43%가 월 가계소득 200만 원 이하의 사람이었고 월 100만 원 이하도 13%를 차지했다. 반면에 월 500만 원 이상의 계층은 6%에 불과했다.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성인게임기를 허용하게 되면 주로 어떤 계층이 돈을 잃게 될지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정부는 오락실 주변에서 상품권이 현금화되는 걸 알면서도 상품권 업체를 19개나 내세우고 상품권을 남발했다. 상품권을 바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오락실’이 ‘도박장’으로 바뀐다는 걸 몰랐다면 정부도 아니다.

‘바다이야기’는 2004년 말 출시된 이후 계속 새로운 버전을 내놓았고 최고 400만 원까지 딸 수 있는 더 막강한 게임기도 등장했다. 정부는 그때마다 꼬박꼬박 허가를 내줬다. 사행성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서민이 도박에 빠져들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도박중독은 파멸을 뜻한다. 최근 오락실 업주들은 저소득층이라는 ‘단골손님’을 찾아서 달동네와 공장지대 바로 옆으로 다투어 진출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정책적 오류’라고 했다지만 상품권과 성인게임기 허가 과정에서 권력이 개입한 비리의 정황이 포착되고 있으므로 그렇게 쉽게 결론 내릴 일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이 정권이 서민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현 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12월 66만 명이던 실업자는 지난달 말 82만 명으로 늘어났다. 개인파산 신청자는 2003년 3856명에서 올 상반기에만 4만9581명으로 급증했다. 빈곤층은 700만 명이 넘고 신용불량자는 300만 명에 육박한다. 서민의 삶은 ‘서민정부’ 아래서 피폐해졌고 나아지는 낌새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진정으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박장에 데리고 가라는 말이 있다. 도박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손쉽게 패가망신(敗家亡身)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서민정부’가 앞장서서 수많은 서민을 도박장으로 데려간 꼴이다. 참으로 충격적이고 기막힌 사태 아닌가.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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