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녕]‘성난 얼굴’

  • 입력 2006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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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까지 나왔으나 낮에는 노점상, 밤에는 재즈바에서 트럼펫 연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지미 포터는 터질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산다. 지미는 중산층 출신의 부인 앨리슨을 학대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자신의 좌절감과 박탈감을 분출한다. 영국의 전위(前衛)작가 존 오스본이 1956년 연극무대에 올린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얘기다. 이 작품은 영국 노동계층의 찌든 일상을 ‘성난 얼굴’로 묘사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후 상실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반향을 얻었다.

▷이 희곡의 제목을 연상케 하는 일들이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다. 더구나 종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정치인, 시민·사회운동가, 학자 할 것 없이 우리의 과거를 온통 잘못된 것인 양 ‘성난 얼굴’로 매도, 규탄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런 과거를 청산, 단죄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을 것처럼 행동한다. 대한민국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규정한 현직의 대한민국 16대 대통령부터 그런 모습이다.

▷권태준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는 “우리는 왜 성난 얼굴로 뒤만 돌아보느냐”고 묻는다. 그는 이번 광복절에 낸 저서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에서 “지금 이 나라 집권세력은 과거에 대한 비판과 부정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충만해 있는데, 그것은 과거의 성공적이고 역동적인 ‘국가 만들기’와 그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권 교수는 반문한다.

▷권 교수는 과거사 비판과 부정에 매달리는 지식인들을 세계화라는 세계시간대에 본능적으로 적응하는 대중보다도 뒤진 ‘시대착오적 집단’이라고 질타했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어디 권 교수뿐일까.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E H 카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채워 넣어야 바로 설 수 있는 빈 자루’를 역사라고 봤다. 이 나라의 지식인과 지배그룹은 무엇으로 나라의 빈 자루를 채울지 스스로 고민하고 행동할 일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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