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고법 부장판사’라는 자리

  • 입력 2006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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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3년 전 일이다. 13일자로 정년퇴임한 권성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을 때다.

당시 권 부장판사는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군의 유족이 낸 손해배상 사건의 재판장이었다. 1993년 7월 그는 이 소송에서 ‘신원권(伸寃權)’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내세워 국가는 유족에게 1억7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신원권은 가족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했을 때에 그 억울함을 풀어 주는 권리라는 게 판결문의 논지였다. ‘탁 쳤더니 억 하고 죽었다’며 고문 사실을 은폐한 것은 신원권을 침해했다는 얘기다. 권 부장판사를 만나 이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논리를 편 이유를 물었다. “명색이 고등법원 판결인데 유족에게 ‘그냥’ 위자료를 주라고 할 수는 없잖아. 옛날엔 대궐 앞에 찾아가 신원하는 일이 많았는데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찾아낸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법원에서야 좋아할 리가 없겠지. 만날 들이받기만 하는데…. 이러다가 대법관이 못 돼도 어쩔 수 없지”라며 웃던 그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신원권’ 개념은 2년 뒤 대법원의 최종심에서 “다소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대법원은 다만 “진상은폐행위에 따른 위자료 지급 의무가 있다는 결론은 정당하다”며 파기환송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 무렵 권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례를 거스르는 ‘사상 첫 판결’을 자주 내놓아 이런저런 구설에 시달렸다.

1992년 12월에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보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나중에 대법원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1993년 3월에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와 달리 “여성 호주에게도 종중재산을 분배하라”고 판결해 법조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권 부장판사에 대해 “진취적인 소신 판사”, “럭비공 판사”라는 양 극단의 평가가 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의학적으로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폐암 사망자에게 업무상 재해를 처음으로 인정했고, 성폭행을 피하려 상대 남성을 칼로 찔러 숨지게 한 여인에게는 ‘정당방위’ 이론을 동원해 무죄를 선고했다.

일반 국민의 법감정과 상식에 부합하는 판결을 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대법원의 파기환송쯤이야 두려울 게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평가는 엇갈렸으나 모름지기 고법 부장판사쯤 되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한다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법시험 8회 동기 중에서 줄곧 선두주자였지만, 2000년 6월 대법관 발탁 과정에서 미끄러졌다. 7년 전 스스로 예감했던 대로였다.

고법 부장판사는 사실심의 마지막 관문인 2심의 재판장이다. 그래서 오심(誤審)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자리다. 법관이면 누구나 꿈꾸는 대법관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판사 개인으로서는 관리자인 법원장으로 나가기 직전 단계여서 20년가량 갈고닦아 온 법철학을 판결로 활짝 꽃피우는 황금기다.

반면 젊은 판사 시절의 기백과 도전 정신이 희미해지고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사법 기득권 수호에 연연하는 함정에 빠지기도 쉽다.

최근 동료 후배 판사에게 사건 부탁을 한 이른바 ‘관선(官選)변호’ 비리로 구속된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추락은 여느 법조 비리와 비할 게 못 된다. 다른 무엇보다 그는 ‘고법 부장판사’였기 때문이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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