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용준]도적같이 온 해방

  • 입력 2006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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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도 모를 것이 역사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지만, 미래는 예측 못하니 역사가 물리학적으로 예측이 된다면 역사는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예측해 보아야 한다. 예측하면서 예측 아니 되는데도 예측해 보는 데 역사가 있다. 어련히 오고야 말 해방인 줄 믿었지만 또 못 믿었다. 그러므로 정작 온 때는 모두가 꿈인가 하였다.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는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일제 36년 하면 그렇게밖에 아니 되었던가 의심이 난다. 그 고난은 그렇게 심하였고 영원히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악착같은 일본이 삼천리강토 2000만 민족을 몽땅 통째로 삼킨 지 1만2771일 만에 한마디 소리도 크게 지른 것 없이 맥없이 물러나던 날 당시 45세의 함석헌 선생은 고향인 평안북도 용암포 밭에서 거름을 주다 해방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불후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위의 글과 같이 역사를 풀이하면서 ‘도적같이 온 해방’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즉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도둑같이 왔다는 것이다. 도둑이 예고하고 오나? 그러니 그는 ‘하늘이 준 떡’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탄식했다.

‘참 분한 일은 이 해방을 도둑질해 가려는 놈이 많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만은 이 해방을 미리 알았노라고 선전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 도둑같이 온 해방을 자기네가 보낸 것처럼 말하여 도둑질해 가려는 심정에서 하는 소리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시대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왜 8월 14일까지 그렇게도 복종을 하고 있었던가? 그때에 한마디라도 미리 말하여 민중을 위로하고 용기를 가다듬어 준 것이 있다면 이제 와서 새삼스러이 선전을 하지 않아도 민중이 지도자로 모셨을 것이다. 이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에 도둑같이 왔다.’

이렇게 해방이 도둑같이 온 것은 이 나라의 해방을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으려는 섭리의 소치라고 함 선생은 풀이한다.

‘어떤 나라도 국민의 가슴속에 감사와 감격하는 생각을 기르지 않고는 스스로를 향상시킬 수도 없고 국제 간 친선을 도모할 수도 없다. 우리 마음속에 감사와 감격이 넘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마음이다. 역사에 새 통일을 주는 것이고, 역사의 근본이 되는 정신 속 자기를 발견하는 일이다. 우주의 윤리적 질서를 회복함이다.’

18세 홍안의 소년으로 해방을 맞이한 나는 뇌리 속에 서울 거리를 메우며 대한민국 만세를 환호하던 민중의 감격에 넘친 그 부르짖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감사와 감격을 앗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정상모리배는 해방을 자기들이 가져왔노라며 하늘과 민중과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속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와 감격이 퇴색되어 버린 실패한 해방의 의미를 오늘날에도 다시 되씹어 보아야 한다.

일제 강점 36년간의 후반부에 태어나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 되는 교육을 받아 온 젊은이에게 해방 후 밀어닥친 좌익 서적의 홍수는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에 해방된 지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 우리 민족으로서는 지금까지도 해석이 되지 않는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없앤 것보다 더 많은 인명과 물자를 없애면서도 선전포고도 없이 6·25전쟁은 시작됐다. 이를 최전선에서 경험한 나 같은 늙은이들이 아직도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한 이 싸움에 대한 최근 시민단체들의 이상야릇한 행동은 용납될 수가 없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 기습상륙작전의 승보는 숨을 죽이면서 숨어 살던 당시 대한민국의 민중에게는 그야말로 또 한번의 하늘이 내린 만나(떡)가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 맥아더 장군이 6·25전쟁을 ‘신학(神學)의 싸움’이라고 말했다지만 함 선생도 그의 역사책에서 6·25전쟁을 ‘신(神)들의 싸움’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준비 없이 순식간에 전국을 점령당하다시피 한 당시 남한의 상황을, 전국이 황폐화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예언 아닌 예언을 남기고 있다.

‘하나님(生)은 싸우는 존재다.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다. 하나님의 지나가는 길 뒤에 부서지는 물결이 전쟁이란 것이다. 하나님(靈)의 나가는 길을 모르고 저항하기 때문에 전쟁은 일어난다. 인간의 역사 진행의 뜻을 알아 저항하기를 그만두는 날 영원한 평화와 자유는 올 것이다. 그 뜻을 배우라는 것이 지금 오고 있는 우주시대요, 그 시대에 시작되는 나팔소리가 6·25다. 새 시대에 동트는 것이 38선이다’라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납득할 수 없는 8·15 사면 복권,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등 역사의 흐름에 어긋나는 불협화음 속에 감사와 감격이 없는 61번째의 ‘도적같이 온’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도도한 물결은 새 시대의 여명을 밝히고 있다.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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