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反美정서의 뿌리

  • 입력 2006년 8월 8일 21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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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부산지부가 내부 교육용으로 그대로 베낀 ‘현대조선역사’는 북한의 대표적인 현대사책이다. 김일성에 초점을 맞춰 그가 어떻게 항일투쟁을 했으며 어떻게 북한을 이끌었는지 서술하고 있다.

‘김일성 찬양’에 충실한 만큼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무조건 북한은 미화하고 남한은 깎아내리는 식이다. 이 책의 ‘남조선 인민들의 구국투쟁’편은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이승만의 추악한 매국 책동으로 말미암아 남조선에서는 정치 경제적 위기가 갈수록 격화되었다’로 시작하고 있다.

북한의 체제 선전물이나 다름없는 이런 책은 비판적 접근이 필수임에도 전교조 교사들은 어디서 베낀 것인지 밝히지도 않은 채 자료집을 만들고 세미나를 열었다. 교사들은 “이렇게 파문이 커질 줄 몰랐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교사들이다.

‘현대조선역사’라는 책은 전교조 파문 이전에도 학자들에 의해 몇 차례 거론된 바 있다. 우리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을 비판하는 학술모임에서다. 김광동 나라정책원장은 “일부 현대사 교과서들이 북한의 ‘현대조선역사’의 서술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두 책을 조목조목 비교해 얻은 결론이다.

‘현대조선역사’는 남한에 대해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였고 잘못된 길을 걸었으며 그래서 민중이 저항했지만 아직 완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정치권 386들이 표출해 온 역사 인식과 겹친다.

국내 교과서도 남한의 독재와 자본주의 모순, 민중 항쟁을 강조하지만 북한에 대해선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내용이 많다. 북한 역사책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국내 교과서 집필자들이 정말 ‘현대조선역사’의 서술방식을 추종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교과서에서 쉽게 감지되는 것은 반미(反美) 성향이다. 교과서들은 광복 직후 한국이 가야 했던 방향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국가’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을 설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선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금성출판사가 펴낸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미국에 대한 기술이 167곳에 나오지만 긍정적 기술은 3곳에 불과하다는 분석결과가 있다. 이런 책으로 배우는 학생들한테 반미 정서가 형성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영화 하나를 만들어도 반미 분위기를 풍겨야 장사가 되는 세상이다.

한국이 짧은 기간에 빈곤에서 탈출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남한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식한 결과다. 8·15 광복은 우리 손으로 쟁취한 게 아니었고 연합군, 특히 미국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교과서는 ‘미국이 남한에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미군정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나빠져 갔다’거나 ‘우리가 나라를 되찾은 것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한 대가’라고 쓰고 있다. 의도적인 역사 외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현대조선역사’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점이다. ‘현대조선의 역사를 근로인민대중이 주체가 되고 동력이 되어 창조되고 발전되어 온 근로인민대중 중심의 역사로 서술했다’며 민중운동사임을 확실히 내세운 것이다.

우리 교과서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아닌 ‘민중민족항쟁사’를 썼다는 비판을 듣고 있으나 집필자 누구도 그런 ‘커밍아웃’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특정 시각으로 역사를 독점하고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이 시간에도 학생들은 이런 교과서로 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전직 국방장관이 했다는 “청소년들을 이렇게 가르쳐서 군대에 보내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한마디에 ‘일그러진 역사’의 현실이 함축되어 있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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