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광호]선거홍보물 버리면 안되는 이유

  • 입력 2006년 6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전통적으로 한국의 선거는 민주 대 반민주 세력의 정치투쟁과 지역주의가 지배해 왔다. 그 뒤로는 이미지나 감성정치가 들어왔다. 하지만 지난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수도 이전 공약이나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청계천 복원 공약 등이 찬반 여부에 따라 유권자들의 표를 좌우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정책 선거’의 싹을 보여 주었다.

이후 선거 공약이 후보자의 당락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학습 효과가 확산되면서 과학적인 공약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번 5·31지방선거에서 처음 등장한 매니페스토(Manifesto·참공약 선택하기) 운동이 그 산물이다. 주요 언론에서 매니페스토 관련 기획을 하고 각종 토론회를 통해 정책공약을 검증하려는 노력도 큰 역할을 했다.

매니페스토는 이번 선거에서 처음 시도됐지만 출마자 대부분이 참가해 정책 선거 분위기는 일단 형성됐다. 비록 ‘집권당 심판’이라는 큰 물결에 선거가 휩쓸리면서 선거 결과에는 매니페스토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지만 ‘매니페스토 선거’는 우리 정치에서도 이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을 어떻게 성숙시켜 나갈 것인지는 앞으로의 과제다.

최근 국내에 번역돼 발간된 가나이 다쓰키가 쓴 책을 보면 매니페스토 운동은 제3의 정치권력으로 정의된다. 무엇보다도 매니페스토 운동이 공약의 실현 가능성, 반응성, 효율성을 평가할 뿐만 아니라 당선 후에도 지속적으로 공약 이행 정도를 감시하기 때문이다.

매니페스토 운동이 정착된 나라에서는 정책 선거를 통해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면 1980년 마거릿 대처의 영국 보수당은 ‘작은 정부’와 ‘대런던 의회’ 폐지를 핵심 정책공약으로 내세워 18년 만에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도 교육 최우선주의, 소득세 동결,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 등 중도 성향의 정책 개발을 통해 18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영국에서는 각 정당이 발간하는 정당공약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유권자들의 관심이 높다.

미국의 경우도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40년 만에 양원에서 모두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은 ‘작은 정부론’에 바탕을 둔 ‘국민과의 계약’이라는 정책공약이 큰 역할을 했다. 이 공약집도 책으로 출간된 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장기적으로 볼 때 매니페스토 운동의 사회적 편익은 매우 크다. 무엇보다 각종 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따르는 비용을 줄여 준다. 왜냐하면 선거 과정에서 정책의 실현 가능성, 반응성, 효율성 등을 미리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일반 유권자가 중심이 된 일상생활 속의 상향식 매니페스토 운동은 우리 사회에 아직 정착돼 있지 않다. 언론이나 전문가 위주의 하향식 매니페스토는 일반 시민 중심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시민도 이에 필요한 자질이나 덕목을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유권자는 공공생활에 적극 참여하여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숙의한 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정치 문해력(political literacy)’을 지녀야 한다. 또한 후보자들이 제시한 정책공약을 충분히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인 ‘정책 문해력(policy literacy)’도 갖춰야 한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스웨덴의 독서클럽은 일과 후 지역 주민이 이 같은 역량을 키우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이번 선거의 홍보물을 버리지 말자. 정책공약집에 대해 비판적으로 토론하고 평가하는 ‘정책공약 독서클럽’ 같은 모임을 만들어 보자. 선거 공약과 실천이 사회 발전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한번 실험해 보자.

정광호 서울대 교수·행정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