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청춘을 독일에 묻은 간호사들의 추억

  • 입력 2006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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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독일 파견 40주년 기념행사가 20일 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1960년대 꽃다운 나이로 낯선 땅으로 떠났던 이들은 이제 초로(初老)의 나이가 됐다. 1500여 명이 모인 행사장에선 고단했던 젊은 날의 추억, 실향(失鄕)의 감회에 젖어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제는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집값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포기했다”는 탄식도 들렸다.

1966년부터 10년간 파견된 간호사는 1만226명이었다. 이들은 월 440마르크(약 110달러)를 받으며 말이 통하지 않아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래도 억척으로 주말근무까지 해 돈을 모았다. 1963년부터 14년간 우리 광원 8000여 명도 독일에 파견돼 외화를 벌었다. 막장에서 다치거나 죽기도 했다. 이들이 국내에 송금한 돈은 한때 연간 5000만 달러로 국민총생산의 2%대에 이르렀다. 그 무렵 우리의 1인당 연소득은 100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20달러)에도 못 미쳤다.

나라의 형편은 비참했다. 경제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 빌다시피 해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따냈다. 그러나 ‘극빈(極貧) 대한민국’에 지급보증을 서줄 데가 없었다. 결국 간호사와 광원들의 임금을 강제 예치해 담보로 썼다. 이들의 초기 월급은 3년간 코메르츠방크에 고스란히 예치됐다. 이것이 애국이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11위의 무역국이 되고 국민소득도 2만 달러를 내다보게 된 이면에 이런 과거가 있었다. 부자나라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일원이 된 데는 지난날 간호사와 광원, 베트남전 참전 장병, 중동건설 역군들이 흘린 눈물과 피땀이 밑거름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불과 한 세대 전의 몸부림, 그 시절 선배들의 희생과 헌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과거를 오늘의 눈으로 마름질하고 제멋대로 폄훼하는 것이 부도덕한 ‘역사 모독’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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