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추전역을 아십니까

  • 입력 2006년 4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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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추전역에 다녀왔습니다. 금요일 밤길을 달려갔다가 다음 날 돌아오는 빠듯한 일정이었습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오지(奧地)를 돌아다니면서 두 차례 들렀던 곳입니다. 이번 칼럼을 준비하면서 굳이 다시 찾은 것은 현장감을 느끼고 싶어서였습니다.

강원도 태백시의 추전역. 해발 855m로 국내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운 역입니다. 8년 전부터 환상선 눈꽃순환열차가 지나는 겨울철 관광지입니다. 추전(杻田·싸리밭)이란 이름과 이미지에서 ‘쓸쓸한 낭만’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1973년 10월 16일 태백선 고한∼황지(현 태백) 15km 구간이 개통됐습니다. 험준한 산악과 협곡이 즐비한 태백산맥을 가로지르는 난공사였습니다. 이날 기념식이 열린 곳이 ‘한국에서 제일 높은 역’ 추전역입니다. 역사(驛舍)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김신 교통부 장관, 이동화 철도청장, 이직상 초대 추전역장이 기념테이프를 자르는 빛바랜 흑백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태백선은 전형적인 ‘산업 철도’입니다. 태백·정선 지역 무연탄 수송이 주된 역할이었죠. 어느 시인은 추전역을 ‘서민의 애환 덜컹이는 태백선 완행열차/그 화력 좋던 석탄 실어 보내고/가슴 비운 사람끼리 꿈을 안고 찾아드는/태백의 관문’이라고 썼습니다.

이 역에 근무하는 김수기 과장은 “아직도 밤에는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오지”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연평균 기온이 가장 낮고 적설량은 가장 많은 역이기도 합니다.

1973년 한국은 10월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겨울 공화국’이었습니다. 태백선 개통 2주일 전 서울대 문리대생 300여 명은 유신 후 첫 시위를 벌였습니다. 다음 달 한국기자협회는 사실보도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합니다.

하지만 더 살펴보면 다른 풍경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해 7월 역사적인 포항제철 1기 설비가 준공돼 쇳물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소양강댐 완공과 남해고속도로 개통도 같은 해였습니다.

독재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을 지금도 높이 평가합니다. 세월이 흘러 일부 ‘민주 투사’가 보여 준 일그러진 행태는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얼어붙은 시대에 민주주의를 외친 열망과 투쟁이 옳았다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경제성장도 정당한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그 시대의 땀이 없었다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이 지금 같은 경제대국으로 떠오르긴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리는 주요 산업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습니다.

후진국이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쉽지만 이런 이상적 공존(共存)은 없었습니다. 굴곡은 있었지만 한국처럼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까지 이룬 사례도 손꼽을 정도입니다. 우리 현대사는 한쪽만 옳고 다른 쪽은 틀렸다고 여기는 이분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추전역에 서서 한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해봤습니다. 눈을 밖으로 돌리고 경쟁과 차별화의 장점을 살린 개발연대의 긍정적 유산(遺産)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토대 위에 관치(官治)와 정경유착의 폐습에서 벗어나 민간의 창의성과 활력을 꽃피우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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