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혼혈’은 힘이다

  • 입력 2006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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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식축구 스타 하인스 워드가 한바탕 혼혈인 열풍을 불게 하고 어제 미국으로 돌아갔다. 슈퍼볼 최우수선수(MVP)로 뽑힐 정도로 강인한 사나이인 그가 흘린 눈물과 홀어머니에게 보여 준 지극한 효성은 많은 한국인을 감동시켰다.

워드 덕분에 사람들이 상당히 변한 것 같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민족이라는 뒤늦은 고백이 나오고 혼혈인 냉대에 대한 반성은 차별금지법 제정 방침으로 이어졌다. 한국인을 어머니로 30년 전 이 땅에서 태어난 한 미국인이 뿌린 소중한 밀알이다.

순수한 혈통은 자랑할 만하지만 순혈 자체가 항상 최고는 아니다. 파리와 로마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도시다. 로마의 뿌리는 기원전 로마시대로, 파리의 주요 건축물 연원은 최소한 수백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양국 국민은 물론 외국인으로부터도 똑같이 사랑을 받지만 로마와 파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란 점에서는 로마가 파리를 따라가지 못한다.

18세기에 문을 연 루브르박물관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유리 피라미드는 1989년에 지어졌다.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축물이지만 중국계 미국인 이오 밍 페이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고대와 현대, 프랑스와 미국의 공존이 이룬 걸작이다. 시대와 인종의 ‘혼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역시 1989년에 만들어진 파리 서쪽 라데팡스의 신개선문(그랑다르슈)도 덴마크 건축가 요한 오토 폰 스프레켈센의 작품이다. 1977년에 개관한 퐁피두센터는 이탈리아인 렌조 피아노와 영국인 리처드 로저스의 머리에서 나왔다.

과거에 현재를 추가하고 외국 문화를 과감히 수용하면서 파리는 점점 더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도시로 발전했다. 프랑스 문화의 비결은 결국 ‘열린 문화’의 힘이다.

서울에도 아직은 미약하지만 파리 스타일의 변화가 서서히 닥치는 것 같아 마음을 설레게 한다. 12층 사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려다보는 청계천 출발점에 요즘 새로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 설치미술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을 세우기 위한 기초공사다. 머지않아 다슬기 모양의 높이 20m짜리 조형물이 눈 아래 펼쳐지게 된다. 340만 달러를 들여 왜 외국 작가의 작품을 서울 한복판에 설치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파리의 에펠탑과 유리 피라미드를 놓고 프랑스인들도 처음에는 반대했다는 역사를 떠올리며 혼자 웃는다.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스위스), 장 누벨(프랑스), 렘 쿨하스(네덜란드)가 지은 남산의 리움 미술관이 서울의 명소가 되고 있다는 최근 소식도 반갑다.

‘혼혈 배척’은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는다. 세계적 조류는 피의 섞임이든, 문화의 섞임이든, 경제의 섞임이든 모든 혼혈에 대해 관대해지라고 요구한다. 인종과 문화의 혼혈은 돈 잘 벌기 위한 경제적 세계화보다 훨씬 고상하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외국이 어우러지는 서울, 멋지지 않은가. 성공한 워드는 치켜세우면서 그보다 못한 혼혈인은 무시한다면 얼마나 값싼 차별인가.

한국에는 3만5000명의 혼혈인이 있다고 한다. 정부 통계가 없어 펄벅재단이 집계한 수치에 의존해야 할 만큼 그동안 혼혈정책은 무대책이었다. 현재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고 있기 때문에 2020년엔 혼혈인이 167만 명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워드의 출현은 시기적으로 절묘했다. 그가 뿌린 밀알이 30배, 60배의 결실을 거두는 날이 곧 오기를 고대한다. “외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노력했다”는 미인대회 입상자의 말을 진심이라고 믿을 정도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 날 말이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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