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기획 만능 시대

  • 입력 2006년 4월 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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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경기에는 거의 예외 없이 ‘반칙왕’이 등장했다. 그는 운동 팬츠 속에서 ‘흉기’(대개 병따개)를 꺼내 김일 선수의 이마를 찍었다. TV를 통해 전 국민이 흉기 꺼내는 모습을 다 보는데 왜 심판만 딴 곳을 보는지…. 어린 마음에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김일 선수였다. 유혈이 낭자한 이마로 박치기를 하면 반칙왕은 과장될 정도로 휘청거렸고, 최후의 일격을 받아 마침내 매트에 쓰러지면 온 동네가 뒤집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한 편의 ‘기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린 내가 프로레슬링의 기획 드라마에 열광할 무렵, 한국의 선거판에는 엄창록이라는 네거티브 기획 전문가가 활약했다. ‘돈 봉투 줬다 뺏으며 상대방 캠프 이름 대기’, ‘상대방 후보 이름으로 유권자를 음식점에 초청했다 헛걸음치게 하기’ 등 그가 개발한 수법은 한국 네거티브 선거 기법의 원조가 됐다.

이후 선거 때면 ‘색깔론’ 같은 네거티브 기획이 등장했지만 ‘바보 노무현’으로 불릴 정도로 순수함을 앞세웠고, 도덕성을 무기로 한 재야와 운동권을 등에 업은 노 대통령이 네거티브 기법에 힘입어 당선된 것은 아이러니다.

대선 당시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처럼 보였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결정타를 먹인 것은 이른바 ‘3대 의혹’ 제기였다. 측근과 부인의 거액 수수설, 아들의 병역비리 은폐 의혹은 박빙의 선거 판세를 갈랐다.

3대 의혹 사건은 올해 2월까지 차례로 법원에 의해 ‘사실무근’으로 판명이 났다. 네거티브 기법 중에서도 질 나쁜 반칙이었던 셈. 법적으로는 사술(詐術)에 의한 법률행위는 원천 무효가 되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달랐다. 선진국 같으면 정권이 흔들렸겠지만 한국에선 미동도 없었다.

현 정부 들어 유난히 기획이 강조되고, 기획 전문가가 대우받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일단 이기면 된다’는 인식이 기획 만능주의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 당시 노 후보 측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았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자랑스럽게 “대선 기획은 내가 국내 최고”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 후보 캠프에서 기획을 맡았던 이광재 의원은 지금도 열린우리당 지방선거 전략기획단장이다. 금융브로커 김재록 씨도 한 강연에서 자신을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전략기획특보를 맡았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운동권 출신의 한 정치권 인사는 “운동권 출신이 기획에 능한 것은 당연하다. 독재 정권의 기획과 공작에 맞서려면 그 생리를 배울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기획으로 대응해야 했다”고 말했다.

여권의 훈련된 기획력에 한나라당은 번번이 당하고 있다. 여권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3대 의혹 판결 때도 ‘특별검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만 하고 지나갔다. 기획과 공작의 대표선수 격인 민정당의 맥을 이어받았지만 두 번의 대선 패배로 기본적인 기획력마저 잃고 ‘웰빙’만 남은 것이다.

또다시 찾아온 기획의 계절, 얼마나 많은 선거 기획과 기획꾼이 난무할까. 노 대통령은 “지방선거는 반칙하는 사람이 패배하는 선거가 돼야 한다”고 했지만 지난 대선 때 그의 승리의 이면을 잘 아는 출마 후보와 기획꾼들이 승복할 리 만무하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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