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권석창]20여년 만에 되찾은 부부의 緣

  • 입력 2006년 4월 3일 03시 03분


코멘트
우리 역 ‘맞이방’ 한구석에는 40대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연인을 기다리는 들뜬 표정도, 정든 고향을 떠나는 아쉬운 표정도 아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습과 바쁜 일상 속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달을 그 모습 그대로 지내 온 까닭에 옷차림은 남루해지고 꾀죄죄했다. 고운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머리카락은 쑥대머리가 된 채 실성한 여자처럼 주위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맞이방을 언제부터 지켜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략 지난해 가을이 끝나가는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사이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다시 봄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볼수록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시청 여성복지담당 직원과 경찰관 등의 협조를 받아 가족을 찾아 나선 결과 주민등록까지 말소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그는 10년도 훨씬 전에 남편의 사업 실패로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협의이혼을 했다. 홀로 지내던 그는 생활고와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홀어머니가 있는 친정을 찾았다. 하지만 홀어머니마저 돌아가신 친정은 의지할 곳이 못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주 들렀던 경북 김천에 있는 외가를 찾았다. 하지만 외가마저 가세가 기울어 보살핌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맞이방을 지키는 노숙인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그의 전남편에게 여러 차례 연락한 끝에 소식이 닿았다. 그는 단숨에 역으로 찾아왔다. 남편이 역에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 하필이면 그때 맞이방을 지키고 있던 그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남편은 우선 인근 모텔에서 대기하고, 그가 나타나면 연락해 주기로 했다. 그는 새벽녘에야 맞이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락을 받은 남편도 달려 나왔다.

이미 부부의 인연을 끊고 20여 년의 세월을 남남으로 지내 온 까닭에 마음속에 한 줌의 옛정으로만 남아 있는 부부의 인연을 되살리며 서 있는 남녀(남편은 성공한 사업가로, 아내는 거지 행색이 완연한 노숙인이 된 채). 여인의 눈동자는 여전히 허공을 맴돌았다. 남편은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구슬 같은 눈물이 줄줄 흘렀다.

“여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나 모르겠소?” 하고 울부짖는 사내. 그래도 이미 정신을 놓아 버린 여인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과거를 되살리려는 듯 연이은 사내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에서도 경련이 일어났다. 마침내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남편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거렸다.

훌쩍 지나가 버린 20여 년의 가슴 아팠던 여러 사연을 한순간의 대면으로 치유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아픈 사연. 하지만 과거를 묻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가슴을 껴안고 흐느끼는 부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사랑의 보금자리’인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가정에서부터 사랑으로 감싸고 충실히 보살핌을 받는다면 가정 파괴나 갖가지 사회 병폐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박하다’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주변의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정(情)을 담아 보내 주는 여유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권석창 김천역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