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이런 야구, 저런 정치

  • 입력 2006년 3월 2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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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도박사들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우리 대표팀이 일본에 이길 확률을 게임당 4분의 1로 점쳤다. 비록 3차전에서 패했지만 한국팀이 일본팀을 두 번 내리 이겨 16분의 1이라는 희박한 확률을 넘어선 것은 요즘처럼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는 국민에게 모처럼 즐거운 추억 쌓기 선물이었다. 실력과 관계없는 가위바위보에서도 한쪽이 세 번을 내리 이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몇 수 위인 일본에 두 번이나 이기고 참가국 중 최다승을 기록하며 4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한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그들의 감동 스토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번 대회의 일등 공신은 역시 김인식 감독이다. 어느 조직에서든 승패와 성패는 대개 지도자의 능력과 성품에 따라 좌우된다. 청산유수 같은 언변에 쏟아 낸 말을 자주 바꾸고 투쟁적 어휘로 국민을 불안케 하는 지도자들과 달리 과묵한 김 감독은 늘 어눌하지만 신뢰를 주는 말투로 경기를 보는 국민과 선수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그는 “감독 못해 먹겠다”고 투정하기보다 선수들을 믿고 인내했다. 김 감독은 정치인보다 리더십을 더 잘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정치권이 배워야 할 또 하나는 선수들을 선발하고 기용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그의 합리적인 자세였다. 만일 그가 실력이 부족한 선수를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낙하산을 태워 3번 타자 자리에 앉혔다면, 또는 자신의 성격과 코드가 맞는다고 수준 미달의 아마추어를 선발투수로 내보냈다면, 혹은 투수가 실투를 할 때 관중에게 밀릴 수 없다는 오기로 선수 교체를 제때 하지 않았다면 어떤 성적이 나왔을까. 그의 냉정하고 설득력 있는 용병술에 선수들은 승복했고 국민은 박수를 보냈으며 그 결과는 승리로 이어졌다. 김 감독은 지도자의 덕목을 정치인보다 더 잘 터득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서 경쟁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기회이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 등 야구 선진국 ‘시장’에 진출한 우리 선수들은 국제 수준에 걸맞은 실력을 발휘했다.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하려고 기울인 노력이 그들의 기량을 얼마나 향상시켰는지 선수들은 경기를 통해 몸으로 말해 주었다. 야구 선수들처럼 우리 기업도 외국에 나가 경쟁하고 외국 기업도 국내에 들어오고 있다. 이런 시대에 반미 반일 반외세를 애국으로 착각하고 국민에게 배타주의를 선동해 온 정치인들이 야구대회를 계기로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반성하고 고칠 수는 없을까.

경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도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의 연봉은 상위 20%의 합계가 하위 80%의 그것보다 더 많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청와대 홈페이지 주장처럼 상위 20%가 하위 80%의 소득을 빼앗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듣기 좋은 평등주의로 선수들의 연봉을 똑같이 맞춘다면 선수 간 양극화 현상은 해소될지 모르지만 팀 성적은 어떻게 될까. 미국의 농구스타 마이클 조든이 현역으로 있을 때 그의 연봉은 그를 제외한 팀 전체 선수의 연봉을 합한 것보다 많았지만 백악관 홈페이지를 비롯한 누구도 ‘승자 독식의 정글게임’이라는 무지한 소리를 한 적이 없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라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소련군 장교는 죽기 직전 동료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이웃이 부럽지 않은 평등사회를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부러워할 대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비에트, 이 사회에서조차 재물에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 사랑에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 웃음에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는 언제나 존재했다.” 공산국가에서조차 이루지 못한 평등사회가 참여정부의 소망대로 이 땅에 도래했을 때 과연 우리 국민은 오늘날과 같은 수준 높은 야구 경기를 볼 수 있었을까.

WBC가 열리는 동안 연이은 승전보에 행복해했던 우리 국민은 이제 또다시 독선과 아집의 국내 정치판을 보며 살아야 한다. 세계 4강에 오른 야구와 축구, 그리고 쇼트트랙처럼 국민에게 용기와 감격을 주고 국가적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줄 정치를 우리는 얼마나 더 기다리면 볼 수 있을 것인가.

이규민 경제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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