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민족주의 呪術에서 벗어나자

  • 입력 2005년 12월 1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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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이상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태극기를 흔들 수 없었던 남북 통일축구대회, 반미시위는 방치하고 반북 보수집회는 제지하는 경찰,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에는 기권하고 북한 위조지폐 제조 의혹은 “근거 없다”고 두둔하는 정부…. 모두 ‘동맹’보다 ‘형제’(북한), ‘국가’보다 ‘민족’이 중요해진 패러다임 변화를 상징하는 사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일은 500년을 이어온 조선이 왜 패망했는지를 제대로 규명하는 학술대회 한번 없이 을사늑약(勒約) 100주년이 지나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집단치매에 빠지지 않았다면 ‘내 탓’에 대한 겸허한 성찰(省察) 없이 친일파의 득세와 일제의 책임을 성토하는 ‘네 탓’에만 목청을 높일 수는 없는 일이다. 바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민족은 지고의 선(善)’이라며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현대판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논리다.

‘국사에서의 해방’을 주장해 온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이 같은 기(奇)현상의 원인을 ‘조선은 선한 공동체, 일제는 이 지선(至善)의 공동체를 파괴한 강포한 도적’이라고 규정한 민족사학 진영의 관념적 역사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 “문명의 중심은 ‘우리’이며 가난하더라도 골고루 잘사는 것이 도덕이라는 자폐적(自閉的) 집단윤리”를 조선 패망의 원인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 교수가 지적한 그런 현상이 오늘 이 땅에 되살아나 활개 치고 있지 않은가. 바로 북한과 국내 좌(左)편향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우리끼리’ 논리다. 따지고 보면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주장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우리끼리 통일도 하고 잘 살았을 것”이라는 논리의 산물일 뿐이다.

지금 남쪽에서 국가 정체성(正體性)은 배제된 채 ‘민족주의 과잉’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은 1980년대의 ‘추억’이 결정적이다. 사회주의 민중혁명을 주장했던 세력(PD)이 몰락하고 반미 자주화를 내건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의 주사파(主思派) 세력(NL)이 운동권 주류로 등장한 것이 ‘민족끼리’ 논리 확산의 계기였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이후 북한은 통미봉남(通美封南)에서 민족공조로 전술을 바꿨다. 민족끼리는 북이 주도한 정치적 의제요,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민족에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남쪽과 달리, 북은 체제적 관점에서 냉철하게 이 문제를 다룬다. 북이 말하는 ‘민족’과 ‘우리’는 북 체제 동조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은 반(反)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민족사학자인 이기백 교수는 후학들에게 “민족과 민중이 지상(至上)이 아니라 진리가 지상이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 시대착오적인 자폐적 민족주의 논리가 무비판적으로 횡행하는 작금의 상황은 세계사의 조류에서 남북이 함께 밀려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마저 안겨 준다. 북한 인권문제 등에 대한 국제사회와 동떨어진 시각이 단적인 예다.

‘국가적 정체성’과 ‘민족에 대한 열정’이 균형을 이룰 때 객관적 시각과 세계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설명 능력을 갖출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관념적 민족주의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선진화는커녕 통일의 길도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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