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금동근]다시 살아난 ‘크리스마스 휴전’

  • 입력 2005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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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오랜만에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 한 편이 화제다.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el)’다. 지난달 초 개봉돼 한 달 만에 70만 명이 이 영화를 봤다. 100만 관객 돌파도 시간문제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흥행 순위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올해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라는 후광 효과, 내년 아카데미 영화제의 외국어영화상 후보라는 점이 흥행에 도움을 줬다는 얘기들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의 소재인 실제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의 크리스마스 때 프랑스 북부의 한 전쟁터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뤘다. 영국 프랑스 독일 군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잠시 휴전한 뒤 서로 어울려 크리스마스를 축하한 일로 ‘크리스마스 휴전’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진 얘기다.

영화는 치열한 전투 장면으로 시작한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백병전 끝에 모두 큰 희생을 치른다. 양측이 참호 속에 들어가 숨을 고르면서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프랑스군의 왼쪽에는 연합군인 영국군의 참호가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영국군과 독일군의 참호는 불과 수십 m 거리. 가운데 공간은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다. 참호에서 고개를 내미는 즉시 적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바람에 전사자들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

크리스마스이브. 성악가 출신의 독일 군인이 동료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캐럴을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랫소리가 영국군 참호에 이르자 영국 군인들은 백파이프 반주로 화답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3국의 장교는 ‘노 맨스 랜드’의 한가운데 모여 휴전을 결의한다. 사병들은 모두 총을 내려놓고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게 와인을 선물하고 독일군은 영국군에게 초콜릿을 나눠 줬다. 서로 가족사진을 자랑하고 전쟁이 끝나면 만나자며 주소를 주고받았다. 영국 군목(軍牧)의 집전으로 크리스마스 미사가 진행됐다.

하루만 하자던 휴전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병사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병사들은 시신이 사라진 들판에서 축구를 즐겼다. 적의를 상실한 이들이 더 전투를 한다는 건 무리였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각국 사령부는 자국 병사들을 이곳에서 철수시킨다.

영화는 감정을 쥐어짜내는 장면 없이 담담하다. 프랑스인 감독인 크리스티앙 카리옹은 한 인터뷰에서 “인류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어 왔다”고 털어놨다.

감독의 의도는 적중했다. 많은 이가 이 영화를 통해 인류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장 자크 베커는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자체보다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미국 내 판권을 사들인 소니영화사 역시 “이 영화를 구입하는 이유는 우리가 현재도 전쟁 중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의 이 같은 평가는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분쟁을 염두에 둔 것이다. 특히 이라크전쟁을 겨냥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카리옹 감독은 영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이 영화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영국 군인들에게도 보내기로 했다.

1914년의 병사들은 상부의 명령에 불복했다. 적군이기 이전에 같은 처지의 사람임을 깨달은 인류애로 인해 불복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들이 보여 준 인류애가 오늘날 분쟁 지역에서도 되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걸고 총을 맞댄 적군이 아닌데도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한국의 현실도 잠시 머리를 스쳤다.

금동근 파리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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