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韓日의 ‘닫힌 민족주의’ 대치劇

  • 입력 2005년 11월 28일 03시 07분


코멘트
남북 대치가 심각했던 1970년대. 남북한 정권은 각각 ‘유신체제’와 ‘수령체제’를 강화하는 데 대결 구도를 이용했다. 최근 ‘좌(左)편향 진보’(한국)와 ‘극우 보수’(일본)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진행되는 한일의 ‘민족주의 대치 현상’도 이처럼 ‘싸우며 돕는’ 이율배반적 관계를 닮아 가는 느낌이다. 적어도 올해 들어 벌어진 한일 양측의 감정적 대치는 서로의 강경 대응을 부추기고 내부 강경세력의 입지를 넓혀 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든 것이 사실이다.

우선 우리 정부의 대일(對日) 강공 기조는 ‘우리 민족끼리’ 논리와 밀접히 연결돼 있다. 한 세기 전 한일강제합방의 책임은 전적으로 민족공동체를 파괴한 일본에 있으며 일본은 우리 민족사에 ‘절대악(惡)’이라는 진보 민족사학 계열의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올해 들어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담은 현대사 관련 책을 주로 읽었으며 이것이 대일외교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된 송기인 신부가 기득권의 뿌리를 친일(親日)이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극우보수 논리도 확산일로다. “한국병합은 한국민이 원한 것”이라는 등의 망언을 일삼아 온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 같은 극우파가 이제는 일본 정계의 이단아(異端兒)가 아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일본이 이시하라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짚었다.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은 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비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했다. 정부 외교 사령탑이 이 정도로 나오는 일본이 됐다.

단기적인 대차대조표는 양쪽 다 나쁠 게 없다. 일본 내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9월 총선 승리에 한중(韓中) 양국의 대일 강경 자세가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왔고, 노 대통령의 지지율도 대일 강경 대응 이후 한때 40% 선까지 올랐었다.

문제는 양측 ‘닫힌 민족주의’ 간의 충돌이 합리적 관계 개선의 여지를 줄여 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청와대가 주도하는 우리 쪽의 강경 대응은 외교에서는 금물인 ‘퇴로(退路)를 스스로 차단하는 강경 일변도 대응’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역사 강의’와 ‘무시 전략’으로 맞부닥쳤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한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지적에 고이즈미 총리가 상투적 해명을 하려 하자 노 대통령은 얼굴을 붉히며 역사 왜곡과 독도 문제를 추궁했고 고이즈미 총리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외교는 선택 가능한 현실적 대안을 놓고 벌이는 타협이다. 관념적 가치관에 기울어 한쪽으로 치달으면 회복 불능의 파국(破局)을 초래할 수도 있다. 100년 전 바로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침략의 역사도 ‘닫힌 민족주의’가 충돌한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정권 관계자들은 독도 및 과거사 문제 등과 관련해 안병직 교수의 고언(苦言)을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부각시켜서 자신들이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세력인 양 국민을 속여서는 안 된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