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307년 빌헬름 텔의 사과

  • 입력 2005년 11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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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머리에 올려놓은 표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강심장이 몇이나 될까.

1307년 11월 18일 스위스 알트도르프 마을 광장.

활을 잡은 빌헬름 텔은 묵묵히 아들을 바라봤다.

“저는 아빠를 믿어요.”

멀리 서 있는 아들 발터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활쏘기를 포기하거나, 빗맞히면 어차피 둘 다 죽어야 한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뿐….

화살은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정통으로 쪼개 버렸다.

빌헬름 텔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방관(地方官) 게슬러가 걸어 놓은 모자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가 체포된다. 그 벌로 자식의 목숨을 걸고 활을 쏘아야 했던 텔은 결국 게슬러를 죽여 복수한다.

지배자에게 밉보여 자식을 향해 활을 쏘는 이야기는 유럽에선 드물지 않다.

노르웨이에는 11세기에 개암나무 열매를 아들의 머리에 올려놓고 활을 쏴야 했던 사냥꾼 이야기가 전해진다. 덴마크 역시 12세기에 아들 머리 위의 사과를 명중시킨 명사수의 전설이 있다.

그 가운데 유독 빌헬름 텔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 덕분이다.

실러는 친구인 대문호 괴테에게서 빌헬름 텔의 이야기를 듣고 희곡으로 만든다. 포악무도한 지방관에 맞서 조국을 해방시킨 영웅의 이미지를 심었다. 개인적인 복수 차원의 살해는 공동체를 위한 애국적인 암살로 격상된다.

희곡 ‘빌헬름 텔’이 완성된 건 1804년. 유럽이 한창 정치적 격변기에 있던 시절이었다. 처음엔 그 정치적인 폭발력 때문에 극장 상연이 거부됐다.

빌헬름 텔의 이미지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각색됐다. 수백 년 전 스위스의 명사수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때로는 자유의 상징으로, 때로는 테러리스트로 극과 극을 오갔다.

전해오는 이야기엔 활을 쏜 날짜까지 나와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빌헬름 텔이 실존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엔 실재(實在)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스위스 국민의 60% 이상이 실존 인물로 믿고 있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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