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0년 정치인 811명 활동규제

입력 2005-11-12 03:01수정 2009-10-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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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나면 세상은 영화의 장면 바뀜만큼이나 장면이 급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밝은 전망으로 되어 나갔으면 하는 희망들은 하나하나 붕괴되고 있었다.”

신상우(辛相佑) 전 국회부의장은 1986년 펴낸 저서 ‘고독한 증언’에서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뒤 암울했던 정치권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공무원 정화, 언론인 해직, 삼청교육대 순화 교육 등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1980년 11월 12일 정치권으로 칼을 돌려 정치활동 피규제 대상자 811명의 명단을 1차로 공고했다.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 씨 등은 물론 10대 국회의원 중 21명을 제외한 210명이 대상자에 포함됐다. 한국 정치를 이끌던 인사 중 신군부의 입법회의에 참여한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정치 규제의 틀에 갇힌 셈이었다.

이 조치에는 앞으로 정치권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려는 신군부와 중앙정보부(중정)의 암수가 숨겨져 있었다. 재심 청구를 통해 13일 뒤인 11월 25일 268명을 구제해 준 게 바로 그것. 이른바 ‘채찍과 당근’ 전략이었다.

“11월 23일 남산(중정)의 C 씨가 급히 만났으면 한다는 전화를 해 왔다. 만날 장소로 가자 C 씨와 반장이라는 L 씨가 나와 있었다. 정치활동을 하게 됐다는 것을 미리 알려 준 L 씨는 유치송(柳致松) 씨가 책임자가 되고 나는 조직을 도맡는 책임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치규제에서 풀릴 14명의 명단을 넘겨받았다.”

5공 초기 제1야당인 민한당 사무총장을 지낸 신 전 부의장의 ‘고독한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구 정치인의 손발을 묶어 놓고 새 정당을 창당하는 작업 뒤에는 중정이 있었다. 중정의 지시를 받는 이른바 ‘오더조(組)’가 야당에 심어졌고 야당의 회의나 공천 내용은 10분도 지나기 전에 바로 중정에 알려질 정도였다. 새 질서 창조를 위한 ‘대청소 작업’이라는 명분을 내건 정치권 줄 세우기는 11대 국회에서 민정-민한-국민당이라는 정치 구도를 만들었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1985년 2·12총선의 민의는 민정당의 ‘2중대’로 불리던 민한당 대신 김영삼 김대중 씨가 이끌고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인사들이 대거 출마한 신민당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은 ‘결정적 순간에 위대한 선택을 해 왔던 우리 국민의 힘이 다시 한번 발휘된 쾌거’로 2·12총선을 기록했다.

김동철 정치전문 기자 eastph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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