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워치]붉은 광장서도 “굿바이 레닌”

  • 입력 2005년 11월 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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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 10월 혁명 88주년을 하루 앞둔 6일 오전 모스크바 붉은광장.

광장으로 들어가는 검문소 앞으로 아침 일찍부터 300여 m의 행렬이 늘어섰다. 크렘린 성벽 앞에 있는 ‘혁명의 아버지’ 니콜라이 레닌(1870∼1924·사진)의 묘로 향하는 인파였다.

낡은 외투 위에 옛 소련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노인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줄을 선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혁명기념일을 맞은 참배객보다는 국내외에서 몰려든 관광객이 더 많았다. 러시아에 연수 중인 미국 대학생 10여 명은 “레닌 묘가 옮겨질지도 모른다는 보도를 보고 서둘러 들렀다”고 말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줄을 선 니콜라이(9) 군은 레닌이 누군지 아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의 정치가”라고 수줍게 대답했다. 엄마 타티아나(44) 씨는 “날씨가 좋아 외출했다가 역사 공부도 시킬 겸 왔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검붉은 화강암으로 지은 레닌 묘를 두 명의 위병이 24시간 지켰으나 1993년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위병은 철수했다.

입구 검문소에 사진기를 맡기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따라 조심스레 내려가자 유리관 안에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누워 있는 레닌의 창백한 시신이 보였다. 후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영원히 시신을 보존할 수 있게 만든 것.

하지만 요즘 레닌은 편안하게 영면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사회주의 실험이 70여 년 만에 파탄으로 막을 내렸고 최근에는 ‘굿바이 레닌’의 마지막 단계인 그의 시신을 둘러싼 논란까지 불붙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발렌티나 마트비옌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이 “러시아는 이집트가 아니다. 미라는 땅에 묻자”고 주장하면서 이장(移葬) 논쟁이 촉발됐다. 공산당이 이에 반발하자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레닌 묘 주변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정교회 가르침대로 사람은 죽으면 땅에 묻혀야 한다”며 매장을 지지했다.

레닌 묘는 과거 사회주의의 심장부였다. 옛 소련 수뇌부는 각종 기념일에 레닌 묘 위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붉은 광장의 군사퍼레이드를 지켜봤다. 레닌 묘 뒤쪽에는 옛 소련 지도자와 전 세계의 저명한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무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역대 공산당 서기장들 사이에 악명 높은 비밀경찰의 창시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1983년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원수 등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미국의 좌파 언론인으로 10월 혁명을 기록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쓰고 자신도 워런 비티가 주연한 영화 ‘레즈’의 주인공이 됐던 존 리드와 일본 공산주의자 가타야마 센(片山潛)도 그곳에 묻혀 있었다.

과거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한 각국 지도자들이 레닌 묘에 참배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옛 소련 붕괴 후에는 2001년 8월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이곳을 찾은 처음이자 마지막 국가지도자였다.

한국 대통령 중 레닌 묘 위의 단상에 오른 것은 5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행사에 참석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유일하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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