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참여정부의 ‘복학생 유머’

  • 입력 2005년 10월 31일 03시 04분


코멘트
결혼을 미루는 사람들에게 어른들은 종종 “결혼에도 때가 있다”는 말을 하시곤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는 사람을 채근할 때에도 “공부에도 때가 있다”고 한다. 수십 년 묵혀 둔 말들이 이제야 튀어나와 나라의 정체성을 흔드는 요즘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서 새삼 “말에도 때가 있다”는 걸 실감한다.

말의 내용 못지않게 시점(時點)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개념에 따라 두 가지 단어로 표현했는데 하나는 선형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크로노스(chronos)요, 또 하나는 공간의 개념이 첨가된 카이로스(kairos)였다. 여기서 카이로스란 기회, 적기, 제철 등의 뜻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말로, 흔히 웅변가들이 각종 논쟁에서 이슈를 던지기에 가장 좋은 상황을 일컬었다.

철 지난 이야기는 사람들을 뜨악하게 한다. 오래전 일을 새삼스레 들먹여 주목을 끄는 일은 요즘 유행하는 ‘복학생 유머’(기억에도 가물거리는 것을 최신 유행인 양 뽐내 웃음을 끌어내는 유머)의 소재로는 훌륭할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뜬금없거나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런 위험성을 감지한 고대의 수사학자들은 말의 긴박성을 전달하는 수사학적 상황을 창조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기교의 하나로 가르쳤다.

만약 당시 수사학자들이 오늘의 한국에 온다면 한 수 배워 갈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 엊그제도 아닌데, 지금 정부의 정체성을 놓고 여야가 원색적인 공방을 늘어놓는 일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 친일 논쟁이 강력한 현안으로 부상하게 한 기술에도 혀를 내두를 것이다. 권위주의 시절 한국을 떠난 재독학자 송두율 씨의 때늦은 귀국이 카이로스를 얻은 것도 신기한 일이다. 민주화라는 화두에 가슴 저리던 시절은 엄밀히 말하면 1980년대 말까지다. 수십 년 같은 자리에 서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이 갑자기 한미 간의 이슈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상기해 보면 최근 6·25전쟁이 통일전쟁이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강정구 교수도 사람만 바뀌었을 뿐 모양새는 같다. 차라리 복학생 유머에 가까운 그의 사소한 발언 하나가 이렇게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의 거취를 흔들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는 카이로스를 얻을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대체 누구의 조화일까.

수사학자들은 카이로스를 얻는 데 성공한 말을 분석하고 싶으면 먼저 ‘누가’ ‘어디서’ 그 말을 했는가를 보라고 했다. 그 말이 이루어진 상황을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다른 사람이,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점에 했다면 카이로스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 포착에 성공한 요즘 말들은 과거지사, 그것도 그리 먼 과거가 아닌 광복 언저리의 과거지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들에 시절 인연을 부여한 것은 지금의 참여정부이다.

묻어 둔 말들이 이제야 나와 향연을 벌인다.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었던 말들일까.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혹은 불법이라는 이유로 병 속에 가둬 두었던 말들을 해방시켜 햇볕을 쬐어 주고, 발설자의 인권을 걱정하는 참여정부는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는 친구와 닮아 있다. 그 말들이 햇볕을 필요로 했듯, 우리 긴 헌정사에 한번쯤은 이런 친구 같은 정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포장마차 밖의 세상이 의외로 넓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복학한 친구의 말을 잘 들어 주는 것은 좋으나, 너무 몰입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너도 복학생이냐”고 오해할 것이다. 그러고는 “끼리끼리 논다”며 등 돌릴 것이다. 여러 사람의 말을 골고루 들어 주지 못하는 정부는 또 다른 시절 인연을 거스르는 과오를 반복하는 셈이다.

해묵은 이슈도 현안이 될 때가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아주 오래전에 정부가 개입된 흑인 대상 가혹행위에 대해 처음으로 정부 차원에서 공식 사과를 표시한 적이 있다. 이는 흑인 인권 운동자들이 끊임없이 과거지사의 카이로스를 일깨운 결과이다. 소위 ‘인권정부’가 주도하는 과거와 현재의 화해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