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호택]학문과 宣傳

  • 입력 2005년 10월 6일 03시 06분


코멘트
필자는 강정구 교수와 약간의 ‘학연(學緣)’이 있다. 1997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연수할 때 강 교수가 안식년을 맞아 그 대학에 왔다. 그는 고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와 미국 고등학교에 보냈다.

한 달에 두어 차례 열리는 한국학센터 세미나에서 그의 토론을 경청할 기회가 있었다. 독일의 송두율 교수가 ‘내재적 접근법’에 관해 특강을 한 적도 있다. 강 교수는 진보적인 성향이었지만 공사석에서 지금처럼 드러내 놓고 ‘친북 반미’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강 교수는 그해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비교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학술진흥재단은 이 논문에 최하등급인 ‘D급’ 판정을 매겨 2년 동안 연구비 신청 자격을 박탈했다.

그는 문제의 논문에서 6·25전쟁은 남침이나 북침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국은 6·25전쟁 이전에 내전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의 성격을 ‘민족해방 및 통일 세력’ 대(對) ‘분단 고착화 세력’ 간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6·25전쟁이 북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라는 결론이 역사학계에서 이미 났는데도 강 교수는 전쟁 발발의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만약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두 전쟁(베트남전쟁과 6·25전쟁)이 발발하지도 않았거니와 설사 전쟁이 발발했다 하더라도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혁명세력이 필연적으로 일방적 승리를 성취했을 것이라는 역사 추상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강 교수는 북한의 경제난에 관한 논문에서 ‘참상’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참상을 부른 실패한 체제에 의해 통일이 안 된 것을 한스러워하는 그의 이율배반(二律背反)이 논리적으로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는 진보 매체의 좌담회에서 학술진흥재단의 논문 평가자를 ‘학문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공격했다. “논평자가 이것은 논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선전(宣傳)이라고 했어요. 우리 지식계가 얼마나 서구 편향적이며 사대주의적이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찌들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딴 얘기지만 도올 김용옥 교수가 만든 EBS 다큐멘터리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중 9부 김일성 편에 ‘구호(口號)나무’가 소개됐다.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전국 방방곡곡에 항일투쟁을 독려하는 구호를 나무에 칼로 새기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내고 속살에 붓으로 써 넣었다는 것이다. 도올은 ‘후대인 1961년 19그루가 발견됐으므로 날조일 수 없다’고 자막을 붙였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기록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구호나무 1만2000그루’는 명백한 조작이다. ‘구호나무’는 북한 영토에서만 발견됐다. 김일성이 주로 활동한 만주 동북부 지역에는 그런 나무가 없다. ‘누가 일제강점기에 친일을 했느냐’는 식의 폭로 대신에 일제에 항거한 역사를 써야 한다는 도올의 견해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도올은 날조된 선전을 검증 없이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강 교수의 논문이나 칼럼은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사실과 배치되고, 체제 선전과 구분이 안 된다. 도올의 구호나무 소개는 다큐멘터리 전체 속에서 보면 작은 부분이지만 중대한 실수다. 사실에 대한 해석이 사실 그 자체와 갈등을 일으키는 D급 학문이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