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순지]운보 ‘친일행적’ 세심히 따져봐야

  • 입력 2005년 9월 30일 03시 07분


코멘트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인사 1차 명단에 운보 김기창 선생을 비롯해 홍난파, 남인수, 박시춘 등이 포함됐다.

운보가 친일파로 지목된 것은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 삽화, 식산은행 사보 그림,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 그림 등 때문이다. 그러니까 운보가 순수미술이 아닌 친일적 그림을 그린 것은 1943년 일본이 징병제도를 공표한 다음 1년 남짓한 기간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내야 했던 백성들은 고종의 붕어(崩御)를 계기로 3·1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의 저항의식을 꺾기 위해 문화 말살 정책을 택해 언어와 민족혼을 빼앗고 창씨개명까지 했다. 일제는 징병을 조선의 자발적 참여로 꾸미려고 조선 예술인들을 앞세웠다. 실제로 가수들은 강제 동원되어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불렀다고 증언하고, 화가들 역시 일제의 요구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1909년 1월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전국을 순시했다. 일본의 위엄을 과시하고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한 일본의 요구 때문이었다. 하물며 한일강제합방 전의 군왕도 그러했는데 합방 33년 후 예술인들이 일제의 무뢰배 같은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1930년 귀먹어 학교교육을 받을 수 없던 17세 소년 김기창은 대한제국 말 최후의 어진(御眞)화가를 지낸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갔다. 청력을 잃어 듣고 배울 수 없었던 그의 국가관과 철학적 사고가 그리 튼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 잃고 할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던 청년 운보의 친일적 예술 행위가 자발적이었는지는 좀 더 세심히 따져야 한다.

예술은 인류의 정신문화 가치의 정점이다. 거장들의 작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자자손손 민족유산이 되도록 지켜 내야 한다. 근대 조선미술의 맥을 이어 온 이당은 1936년 ‘후소회’를 결성하였고, 장우성 운보 등이 창립 회원이다. 장우성은 ‘동방미술가회’를 구성했고, 운보는 후소회 회장으로 엄청난 자비를 들여 우수한 청년작가들을 학교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양성했다. 지금까지 70년 전통의 후소회전이 이어져 후배 화가들은 자긍심을 품고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늦었지만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움직임은 옳다. 친일적 그림을 합리화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운보가 친일파라니 심판 기준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누가 심판관 자격을 주었나. 또한 심히 우려되는 것은 모호한 기준을 문제 삼아 파렴치한 진짜 친일파에게 빠져나갈 빌미를 제공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김순지 화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