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렌퀴스트와 이용훈

  • 입력 2005년 9월 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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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5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TV 시리즈로 ‘론 레인저(Lone Ranger)’라는 서부극이 있었다. 악당들과의 텍사스 계곡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순찰대원(Lone Ranger)이 죽은 대원의 옷을 찢어 검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백마를 타고 다니며 악당들을 쳐부순다는 줄거리다.

3일 밤(현지 시간) 타계한 윌리엄 렌퀴스트 미국 연방대법원장의 별명이 ‘론 레인저’였다. 그에게 악당은 ‘소수인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대법관과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는 24년간 일관되게 ‘소수와의 전쟁’을 해 왔다. 소수인종 우대 정책에 강력히 반대하고, 동성애자의 권리와 여성의 낙태권을 거부했다. 그의 사망이 허술한 허리케인 대책으로 수천 명의 소수인종이 사망한 것과 겹친 것은 아이러니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다른 대법원장들과 뚜렷이 대비된다. 제14대(1953∼1969) 얼 워런 대법원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나중에 자신의 ‘최대 실수(the biggest damn-fool mistake I ever made)’는 워런을 대법원장에 임명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워런 대법원장은 흑백 인종 간의 분리 교육에 대해 위헌 선언을 한 브라운 사건의 판결문을 직접 집필했다.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 등을 알려줘야 한다는 미란다 판결도 그의 재임 중에 나왔다.

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닉슨 대통령은 고심을 거듭해 워런 버거를 제15대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버거 대법원장도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 대통령에게 도청 활동이 담겨 있는 테이프를 특별검사에게 넘기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닉슨의 기대를 저버렸다.

1801년 제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이 임명한 존 마셜 대법원장도 결정적인 ‘배신’을 했다. 그는 애덤스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임명한 윌리엄 마버리 등 25명의 판사에 대해 임명의 근거가 된 법원조직법을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마셜 대법원장의 이 ‘배신’으로 연방대법원은 위헌법률심사권을 확립했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자신을 임명한 정치권력에 충실했다. 그는 1971년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 판사로 임명됐고, 1986년 역시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공화당 정부의 보수화 정책에 충실했다.

물론 그의 이 같은 노선이 소신과 법의식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시절에 사법부의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약화됐다는 데 대해서는 미국 법조계에서 별 이견이 없다.

마침 한국에서도 8일부터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 지명자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시작된다. 그는 판사에게 ‘우파와 좌파(Right or Left)’는 있을 수 없고 오직 ‘옳고 그름(Right or Wrong)’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그를 임명한 정치권력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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