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진우/대중은 위험하다

  • 입력 2005년 8월 11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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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에서 ‘올드 보이’를 거쳐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기까지 흔히 ‘복수 3부작’이라고 불리는 박찬욱 감독의 일련의 영화에서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을 사로잡고 있는 강렬한 원한과 분노다. 그 원한과 분노는 영화 속에서 광기에 이를 정도로 고조돼 있으며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폭력을 낳는다. 살인 유괴 감금 고문 테러 등 온갖 일탈과 범죄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갇혀 있는 참담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악순환이 절정에 이를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흐려지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몰가치적 공황 상태가 현전(現前)한다. 이들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최면이나 종교적 회심 같은, 현실에서 한발 물러선 영역에서 안식을 구하는 것은 달리 마땅한 해결책을 구할 수 없는 곤경이 초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복수의 화신인 주인공이 그토록 욕망한 복수가 달성되는 순간 그 또는 그녀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존재의 총체적 무화(無化)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민한 감독이 자신의 영화의 화두로 ‘복수’를 내세운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복수는 어떤 사태에 대한 이성적이고 공적인 대응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사적인 대응이기 쉽다. 그래서 복수라는 말에는 사회적 합리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전근대적 느낌이 짙게 배어 있다. 과연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은 지금 이곳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공적 기능이 철저히 무력화되고 그 자리에 사적 복수가 횡행하는 야만적 상황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거의 어두웠던 정치·사회적 유산과 단절하고 어느 정도 민주화를 진척시켰다고 자부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실은 전근대적 상황과 의식구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상의 반영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비합법적 감금과 폭력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아물지 않은 과거의 역사적 상처가 주는 고통과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공적 영역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게 되며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합리적인 모색 대신 사적인 해결 방도를 찾는 방식이 일반화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치적 조정과 견인이지만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이 점에 있어서도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눈앞의 당파적 이익에만 급급할 뿐 사태의 합리적 해결에는 등을 돌리고 있다. 이는 최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과거 정권의 도청 자료에 관한 처리 문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민주화를 상표로 내건 정권에까지 계속된 국가의 불법을 만천하에 드러낸 이 사건은 지난 시절의 우리 사회가 실은 ‘열린 감옥’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 자료의 공개 여부는 법적 차원에서 판단해 본다면 자명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여론이라는 미명하에 집단적 관음증을 부추기며 공개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되지 않고 사태의 법적 해결 대신 대중적 여론몰이가 주도하는 사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진 사회라고 할 수 없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원형경기장에 모여든 군중이 피에 굶주려 있듯이 현대에 매스미디어 앞에 모여 있는 대중은 정보에 굶주려 있다. 그들은 좀 더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 스릴이 가득한 여흥을 원한다.

최근 우리 사회가 노출하고 있는 난맥상은 더 나은 세계를 분만하기 위한 진통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다. 대중은 위험하다. 대중의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영합하는 정치는 더욱 위험하다. 복수와 파멸과 몰락의 드라마는 현실이 아닌 영화로 충분하다.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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