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96>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29일 03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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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기신을 내세워 초나라 군사들과 패왕의 눈을 속이고 형양성을 빠져 나온 한왕 유방은 우선 다급한 대로 성고(成皐)로 갔다. 성고성 안에는 형양성과 기각지세(기角之勢)를 이룬다며 따로 갈라둔 군사 5천과 장수 여럿이 있었고, 구강왕 경포와 회남(淮南)에서 긁어온 그의 군사도 2천이 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자 한왕은 다시 불안해졌다. 형양성에서 더 많은 장졸들을 거느리고서도 사로잡힐까 걱정될 만큼 어려움을 겪은 탓이었다.

“아니 되겠소. 항왕의 기세가 워낙 날카로워 이 성고성도 안전한 곳이 못되오. 아무래도 관중으로 물러나 세력을 정비해야겠소.”

한왕이 가만히 장량과 진평을 불러놓고 그렇게 말했다. 장량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왕께서 성고까지 버리시면 형양성은 정말로 외로워집니다. 성고가 빈 것을 안 항왕이 뒤를 걱정하지 않고 전군을 들어 형양성을 짓두들기면 주가와 종공 등은 오래 버텨낼 수 없을 것입니다.”

“성고에 약간의 군사를 남겨 의병(疑兵)을 삼고 허장성세로 항왕을 속이면 되지 않겠소?”

한왕이 그렇게 대답했다. 장량이 그래도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루 이틀은 속일 수 있겠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때 진평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항왕은 기왕에도 성고를 돌아보느라 형양성을 치는데 부릴 군사를 따로 제쳐놓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성고를 버림으로써 이곳과 오창, 형양을 잇는 관동의 발판을 잃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래도 대왕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니, 잠시 관중으로 물러나 항왕의 날카로운 칼끝을 피하는 것도 한 방책일 것입니다.”

“과인의 뜻도 호군(護軍)과 같소. 아무래도 대세가 기운듯하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숨을 돌린 뒤에 돌아와 다시 겨뤄보는 것이 좋겠소.”

무엇에 놀랐는지 한왕이 전에 없이 기가 죽어 거듭 관중으로 물러나기를 고집했다. 장량과 몇몇 장수가 끝내 성고를 지키자고 우겼으나 다음날 밤 기어이 성고성을 떠났다. 떠나기에 앞서 한왕이 경포를 불러 말했다.

“과인이 3천 군사를 보태줄 터이니 구강왕은 회남으로 가보시는 게 어떻겠소? 항백이 패왕 곁으로 불려오고, 대사마 주은이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그 땅을 지키러 갔다고 하니 한번 건드려 볼만한 것 같소.”

경포도 한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제 근거지인 회남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원래 이끌고 있던 구강군(九江軍) 수천에다 한왕이 나눠주는 군사 3천을 받아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거기에 한왕을 호위하며 따라가는 군사가 또 5천이라, 성고성은 늙은 군사 3천에 장수 몇 명이 남아 지키는 흉내만 냈다.

하지만 성고를 버리듯 떠난 뒤에도 한왕은 쫓기는 기분에서 쉬 놓여나지 못했다. 5천이 넘는 군사를 거느렸건만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샛길로, 그것도 어두운 밤에만 행군했다. 한왕이 그렇게 사흘을 달려 낙양에 이르렀을 때였다. 낙양을 지키고 있던 장수가 다시 5천 군사를 이끌고 한왕을 마중했다. 군사가 배로 불어나고 장수들이 늘자 한왕도 비로소 한시름 놓은 듯 군사를 멈추고 낙양 성안으로 들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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