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오늘]1989년 장쩌민 中국공산당 총서기 선출

  • 입력 2005년 6월 24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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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비친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그는 자신이 맡게 된 자리가 위태롭다는 심란한 현실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뉴욕타임스)

1989년 6월 24일 중국 공산당의 새 총서기로 장쩌민(江澤民)이 선출됐다. 전임자 자오쯔양(趙紫陽)은 ‘혼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는 비난과 함께 축출됐다. 뉴욕타임스의 논평대로 장쩌민의 위치는 ‘민주적 지도자’ 자오쯔양을 밀어냈다는 눈총을 받으면서 톈안먼(天安門) 시위 탄압을 정당화해야 하는 가시방석과 같은 자리.

장쩌민의 발탁은 뜻밖이었다. 상하이(上海)시 당서기로 경제개발을 이끌었고 1987년부터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일했지만 지명도는 미미했다. 전문가들은 톈안먼 시위 진압의 ‘총대’를 멘 보수파 리펑(李鵬) 총리나 차오스(喬石) 정치국 상무위원을 새 실세로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회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실용노선을 끌고 갈 인물을 우선적으로 원했다. 그가 아끼던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이 연달아 ‘우익 동조’ 혐의로 실각한 상황에서 자칫 ‘정통 사회주의 복귀론’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것. 장쩌민은 경제개혁의 기수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보수 색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의 낙점을 받았다.

장쩌민은 경제 부흥만이 자신의 리더십을 다질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상하이 시장 주룽지(朱鎔基)를 불러 올렸다. 주룽지는 상하이 개혁을 이끈 동반자이지만 그가 ‘항상 나보다 인기가 많다’며 질시했던 대상. 그러나 ‘위태로운 총서기’인 장쩌민에게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 덩샤오핑이 실권을 쥐고 주룽지가 ‘경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날릴 때 장쩌민은 커튼 뒤에 있었다.

1995년 덩샤오핑이 병석에 눕자 장쩌민은 드디어 칼을 뺀다. 자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베이징 시 당서기를 부패 혐의로 축출해 버린 것. 보수적 베이징 인맥에 대한 상하이파의 공격이었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최대 정적(政敵)인 차오스마저 몰아냈다. 8년간의 인고(忍苦) 끝에 장쩌민은 권력을 장악했고 이후 7년간 1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누구에게나 “좋아 좋아”하며 웃는다고 해서 ‘하오하오(好好) 선생’이라 불렸던 장쩌민. 그가 중국 지도자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힘은 웃음 뒤에 숨겨진 냉철한 현실 감각이었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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