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문홍]‘한국版 GPR’가 필요하다

  • 입력 2005년 4월 14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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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안보환경에 변화의 큰바람이 불고 있다. 그중 하나는 주한·주일미군의 대규모 개편으로 현실화된 미국발(發) 바람이다. 역내(域內)에선 오래전부터 중일(中日) 간에 군비 경쟁의 ‘불길한’ 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중(美中) 간에 잠재된 패권 경쟁 바람도 꿈틀거린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최근 한국이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일으킨 바람은 미풍(微風)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미국이 2003년 11월부터 본격 추진해 온 해외주둔미군재배치검토(GPR)가 그 단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안보전략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테러,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등 21세기형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려면 과거와 같은 붙박이식 군사력으론 안 된다는 게 미국의 결론이다. 미군 체계를 미래형 신속기동군으로 전환하고, 전략적 유연성을 높인다는 발상이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미국의 전략 변화는 한국으로선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요인이다. 새 전략에 따라 기존 동맹관계까지 재평가하겠다는 미국에 ‘주한미군의 붙박이 역할 고수’를 주문해 본들 한계가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엔 중일 간의 대립을 중재할 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 균형자론은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응하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나름의 몸짓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대통령이 불투명한 구상을 불쑥 내놓은 것은 경솔했다.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해 국제정치학 교과서 수준의 당위론만 반복하는 보좌진도 답답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이 당면한 과제는 뒷감당이 어려운 전시성 구호를 내세우기보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면서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협력적 자주국방’의 구체적 액션 플랜을 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른바 ‘한국판(版) GPR’ 계획이다. 지난해 11월 국방부는 2008년까지 99조 원을 투입해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나라 안팎의 안보 여건이 전례 없이 요동을 치고, 한미동맹도 이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막연한 발표로는 국민을 안심시키기에 역부족이다.

이 기회에 우리 군 구조를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독자적인 대북 억지력을 확보해 가면서 동시에 동북아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려면 특단의 각오가 필요하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육해공군 간 ‘밥그릇 싸움’ 차원에서 전력증강사업과 병력 감축이 추진된다면 목표도 이루지 못하면서 아까운 예산만 낭비할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은 국권(國權)을 상실했던 대한제국의 치욕적인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여러 차례 밝혔다. 그 점에선 국민 모두가 한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새 역사를 쓰기 위해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 나가느냐다. 최소한의 투자라고 할 ‘한국판 GPR’마저 없다면 동북아 균형자는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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