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8년 美 군정 토지개혁안 발표

  • 입력 2005년 3월 21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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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서도 땅, 북에서도 땅.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처럼 예나 지금이나 땅이 문제였다.

광복이 안겨준 가장 큰 과실은 일본 제국주의와 지주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의 재분배. 조선 농민의 절대 다수였던 소작농들은 엘도라도를 만난 양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쁨은 잠시. 남북을 양분한 미국과 소련은 민족의 중대사를 입맛대로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봉건제도는 타파됐지만 한민족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갈라져 칼날을 겨루는 새로운 비극을 잉태했다.

북은 1946년 3월 6일 먼저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5정보 이상 잉여 토지와 소작 토지 몰수에 이은 무상 분배. 땅을 거저 얻은 북의 농민은 열광했고 이에 반발한 15만여 명의 지주가 대거 남하해버리니 김일성으로선 정권 유지를 위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 됐다.

반면 유상 매수와 유상 분배가 골자인 남의 토지 개혁은 광복 후 3년이 다된 1948년 3월 22일에야 미군정청 법령 제173호 ‘중앙토지행정처 설치령’이 공포됨으로써 이뤄졌다.

그러나 이마저 미봉책이었다. 신한은행이 관리하고 있던 일본인 재산의 분배만 다뤘고 지주의 소유 토지를 포함한 전면 개혁은 1950년 국회의원 선거 뒤로 늦춰졌다.

토지 개혁이 늦어진 이유는 미국의 자본주의화를 지탱해줄 지주 계급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바람에 시간을 번 지주들은 토지를 가족끼리 나누거나 산림, 미개간지, 간척지, 묘지 관리, 법인 명의 등으로 바꿨고 소작농에게 강제로 떠맡기는 수법으로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양을 감출 수 있었다.

결국 농민들은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됐지만 소작농을 하던 때와 비교해 별로 나아진 점이 없었다. 과도하게 책정된 지가상환곡과 영농 비용, 미국에서 유입된 막대한 잉여 농산물은 자작농을 다시 소작농으로 내몰았다.

이런 가운데 새로 등장한 자본가들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가진 거라곤 한 뙈기 자갈땅뿐이었지만 자녀에 대한 교육열만큼은 대단했던 영세농들은 싼값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악순환만 계속됐다.

빼앗긴 들에 봄은 왔지만 아직은 봄이 아니었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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