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지호]‘보수-진보’잣대 시효 끝났다

  • 입력 2005년 2월 23일 1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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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0부터 10까지 선을 하나 그어놓고 이념성향을 파악하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0에 가까울수록 진보적, 10에 가까울수록 보수적, 5는 중도성향이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민적 상상력을 제약할뿐더러 미래지향적 에너지를 훼손하는 이 같은 조악한 방식은 하루빨리 폐기돼야 마땅하다.

21세기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시대다. 이런 시대엔 기준 자체가 이동(paradigm shift)한다. 도대체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가. 위의 기준대로라면 1980년대 운동권적 사고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집권 386과 민주노동당이 가장 진보적인 세력이 된다. 하나 이는 웃기는 얘기다. 자유보다 평등,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확실히 20세기적 진보다. 그러나 세계화 물결에 소극적이거나 저항한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수구다. 2000만 북한 민중을 저버리고 김정일 정권과의 사이비 민족공조에 열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이들을 좌파라 할 수는 있어도 미래지향적 변화에 적극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필자가 수구 좌파, 반동 좌파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세기 진보는 21세기 수구▼

기준이 분명치 않은 보수-진보 개념을 폐기하고 좌-우 개념을 일반화해야 한다. 진보를 자처하면서도 좌파가 아니라고 우기는 이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기에 이러한 규정은 더더욱 필요하다. 메이저 신문들도 수구 좌파를 진보라 불러주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한 줄 1차원 방식’의 한계는 또 있다. 나치즘은 독일어로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를 뜻한다. 그렇다면 극우 전체주의인 나치즘과 극좌 전체주의인 스탈린주의, 그 변종인 김일성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유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그런데 ‘0∼10 방식’대로라면 나치즘은 극우인 10, 김일성주의는 극좌인 0이 되어 가장 거리가 먼 것처럼 취급된다. 결국 1차원 방식은 주사파를 진보라 여기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더불어 보수-진보 분류법은 허구에 기초한 비생산적 이념갈등을 부추긴다. 보수-진보는 역사적 상황에 따른 상대적 개념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같은 이념이라도 조성된 상황과 그 기능에 따라 위치가 바뀐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는 봉건 절대왕정을 타파하고 근대 시민사회를 수립한 진보이념이었지만, 손수건 한 장 훔친 소녀를 사유재산 보호라는 명분으로 교수형에 처하는 반동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처럼 그 어떤 이념이라도 끊임없이 보수(補修)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수구반동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이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정통보수’, ‘중도통합’, ‘진보’ 등을 외치는 세력들이 많다. 이런 이들은 먼저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특히 보수 세력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보수주의는 자체의 이론과 철학이 없다. 그들은 변화의 속도에 대해서만 문제 삼을 뿐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회주의에 대해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강력한 반대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에서 나온다”고 한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념지도 다시 그려야▼

이제 우리는 자유-평등을 X축으로, 세계주의-민족주의를 Y축으로, 친(親)김정일-반(反)김정일을 Z축으로 하는 3차원적 틀을 개발하고 그에 입각해 당당한 이념·정책 경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허구와 싸우는 현재의 모습으로는 결코 21세기의 새 지평을 열어갈 수 없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서강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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