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正祖와 大院君

  • 입력 2005년 2월 4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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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인이 늘어났다. 보수냐 진보냐를 놓고 으르렁대던 여야가 똑같이 실용주의 노선을 강조하고 청와대는 교육부총리에 경제부총리 출신을 기용하는 ‘깜짝 인사’를 했다. 노무현 정권 2년 동안 이어졌던 이념 논쟁이 잠시 수그러들고 누가 실용주의를 더 잘 할 수 있는가를 놓고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

강대국 중국의 변방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민족성이 원래 실용주의적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용주의는 19세기 말 서양에서 등장한 어휘지만 그 옛날에도 이념보다 실천과 유효성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만큼은 예외였다. 조선시대를 관통했던 관념적인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우리 민족이 역사 발전의 기회를 놓치고 식민지 지배의 나락으로 떨어진 배경이 되었다. 약소국으로서 도덕적 이상주의에 매몰된 결과 망국을 불렀던 것이다.

▼넘쳐나는 실용주의▼

조선시대에 개혁을 시도한 군주로는 정조와 대원군이 돋보인다. 정조의 개혁정치는 원칙론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실용성을 추구한 것이었다. 쇄국정책으로 후세의 비판을 받은 대원군은 내치(內治)에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등 실용주의를 도모한 인물이었다. 두 개혁군주의 실패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그때가 우리 역사에서 개혁이 절실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문화군주로서 탕평책과 인재양성에서 상당한 개혁성과를 거뒀다. 왕조시대에 상상하기 힘든 ‘임금과 백성은 한 핏줄’이라는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조의 한계는 본인이 성리학 지지자였던 데 있었다.

정조 재위 시절 조선에는 경세학파, 이용후생학파 같은 실용학문이 들어와 있었으나 정조는 제대로 된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이 추구했던 경세학파는 ‘바르지 못한 학문’으로 보았고, 연암 박지원이 주도했던 이용후생학파는 ‘시류에 영합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용주의를 현실정치에 적극 수용하지 못한 정조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고 민족의 불행으로 이어졌다.

조선조 정치가 가운데 대원군만큼 백성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린 인물은 없다. 그가 서원을 철폐하자 전국의 민초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고 하고, 고종에게 왕권을 내주고 물러난 뒤 2차, 3차 집권까지 하게 된 것도 대중의 지지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본심은 조선왕조의 재건에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전봉준은 “대원군은 유세(有勢)한 자이다. 어찌 시골 백성을 위하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민심을 다독였지만 그 뒤에는 권력 쟁취와 유지의 목적이 숨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대원군 치세(治世) 동안 민생을 위한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던 이유다.

▼실패한 개혁에서 배울 것▼

광화문 현판 교체와 관련해 정조의 개혁정치가 주목받고 있다. 이 논쟁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의 실패 원인을 살펴보는 일이다.

범람하는 실용주의에 얼마나 정치인 자신의 철학이 녹아 있는지, 실용주의를 택한 동기가 얼마나 순수한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어제까지 이념이 중요하다고 떠들다가 실용주의로 옮아간 사람에겐 신뢰를 보내기 어렵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실용주의밖에 대안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면 실용주의 흉내를 내는 것에 그쳐선 안 될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라면 그런 실용주의의 성공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국민을 위함이 아니라, 정권 유지와 획득을 위해 실용주의를 내건다면 기대치는 더 낮아질 것이다. 실용주의가 넘쳐나지만 진짜 실용주의자는 별로 없어 보인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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