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위험사회’ 생존법

  • 입력 2005년 1월 7일 17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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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전동차가 멈추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고장이 나서가 아니다. 전동차에 폭탄이 설치됐다는 협박전화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승객들이 역사를 빠져나가면서 항의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꽤 오래전의 일이다. 한번은 개찰구를 빠져나와 혹시나 하고 승차권 파는 곳을 살펴봤지만 환불을 요구하는 승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영국인에게 “표 값을 돌려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 영국인은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웃기만 했다. 마치 ‘돈보다는 안전이 중요하지 않으냐’고 말하는 듯했다.

만약 이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발생한다면 어떨까. 가정을 전제로 말하긴 뭐하지만 전례에 비춰 본다면 그냥 조용하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해서 그런지 지하철과 관련된 사건이나 사고를 접하게 되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 한 해 이런저런 사건 사고도 많았지만 새해 벽두에 있었던 서울지하철 7호선 전동차 방화사건은 충격적이었다. 192명의 사망자를 낸 2년 전의 대구지하철 참사와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전국적으로 하루 840만 명이 이용하는 지하철 안전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 국민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질적인 책임은 정부로부터 운영을 ‘위임’ 받은 기관이 져야 하겠지만…. 아무튼 지하철 운영의 최우선 과제는 누가 뭐래도 안전일 것이다. 역사와 전동차를 멋지고 쾌적하게 꾸미는 건 그다음 일이다. 그런데도 돈 때문에 아직 안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얘기는 군색해 보인다. 먼저 돈을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쓰고 있는지 자문해 보라. 안전을 위한 시설과 인력 투자에 정말 돈이 모자란다면 적극적으로 정부와 국민을 설득해 수익자부담 원칙에 따라 요금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안전 투자’ 이상으로 중요한 건 지하철을 이용하는 우리 각자의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다. 경찰관 손에 권총을 쥐여주고 거리마다 폐쇄회로(CC)TV를 설치한들 강력사건이 안 터질까. 사람 사는 세상이기에 아무리 조건이 완벽해도 사건 사고를 사전에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이를 줄이고, 또 막상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그 여파를 최소화하느냐가 아닐까. 우리 각자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위 사람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가래로 막기 전에 호미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위험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우리의 귀중한 생명을 남의 손에만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사건이나 사고가 터졌을 때 남 탓을 하고 항의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안전요원’이 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지는 건 어떨까.

이진녕 사회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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