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35>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17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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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아니 됩니다. 이곳은 초나라 땅 깊숙한 곳이니, 우리 군사들에게는 이른바 절지(絶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지에서 싸움을 벌이다 지면 제 땅으로 물러날 수가 없어 바로 사지(死地)가 되고 맙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 이기면 나아가기 좋고 져도 물러날 곳이 있는 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용병(用兵)의 길지(吉地)가 어디 있소?”

한왕이 조금 물러나는 기세로 그렇게 한신에게 물었다. 이미 살펴둔 곳이 있는 듯 한신이 별로 뜸들이지 않고 답했다.

“영벽(靈壁) 동쪽이면 어떻겠습니까?”

“영벽이라, 귀에 익지 않은 땅 이름이오. 거기가 어디요?”

“이곳 부리현(符離縣)에서 서북쪽으로 90리쯤 되는 곳에 있는 작은 고을입니다. 전에 천하를 떠돌 적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그 동쪽에 병진(兵陣)을 펼쳐볼 만한 땅이 있었습니다. 벌판이 넓어 대군을 부리기에 편할뿐만 아니라, 적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기도 수월한 곳입니다. 거기다가 그 벌판 서쪽으로 수수(휴水)가 흘러 싸움에 져도 그 강만 건너면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곧장 탕현(탕縣)으로 물러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한신의 말을 듣자 한왕도 더는 부리현에서의 싸움을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한 달 남짓 그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겪게 된 낭패가 떠올랐는지, 그때부터 군사를 부리는 일은 모두 대장군 한신에게 다시 맡겼다.

한신은 그길로 대군을 몰아 그날 저물녘에는 벌써 영벽 동쪽 벌판으로 옮겨 앉았다.

이튿날 한신은 먼저 군사들에게 나무를 베어 진채 앞에 녹각(鹿角)을 세우고 목책(木柵)을 두르게 했다. 그리고 용도(甬道)로 쓸 참호를 파게하고 든든한 보루를 쌓게 해 앞으로 있을 패왕의 강습에 대비하게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들을 가만히 수수 가로 보내 싸움이 뜻과 같지 못할 때 물러날 길도 닦았다. 쫓길 때 대군이 탈 수 있는 배들을 모아 두게 하고, 다급하면 배 없이도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목도 알아두게 했다.

한신은 패왕이 거기까지 뒤쫓아 오는데 적어도 사흘은 걸릴 것으로 보았다. 패왕이 이끈 초군 주력은 닷새 만에 천리 길을 달려오며 크고 작은 싸움을 거듭 치러온 군사들이었다. 격앙되어 분발하면 초나라 사람 특유의 불같은 투지를 쏟아내는 강동의 자제들이 앞장서고 있다 해도 그들 또한 피와 살로 된 사람의 몸이었다. 이미 팽성을 내주고 달아난 한왕을 하룻밤 쉬지도 않고 바로 뒤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은밀하고 신속한 기동과 집중된 타격을 위주로 삼는 패왕의 전법도 더는 되풀이하기에 무리로 보였다. 적이 드러난 곳에서 방심한 채 멈춰 있을 때는 그 전법이 잘 먹혀들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한군은 쫓기느라 움직이고 있었고, 움직이기에 그 머문 곳을 알기 어려웠으며, 또 그 군사는 한번 호된 맛을 본 뒤라 살피고 또 삼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패왕은 이제는 정면으로 다가가 압도적인 힘으로 한군을 쳐부수고 한왕 유방을 사로잡아야 했다. 그런데 패왕이 아무리 여기저기서 많은 한군을 무찔렀다 해도, 그 주력은 한왕이 있는 곳에 몰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군을 쳐부수자면, 패왕에게도 어느 정도는 대군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자면 아무래도 며칠은 걸릴 것으로 보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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