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30>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12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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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이 동쪽으로 달아난 한군을 쫓아 팽성 동문을 나서자 뒤따르던 장수들이 물었다.

“우리가 동쪽으로 뒤쫓는 사이 남쪽으로 간 한군과 유방이 멀리 달아나버리면 어찌합니까?”

“남의 우두머리 된 자에게는 우두머리 된 자로서 지켜야 할 체면이 있다. 그런데 유방이 만약 이대로 관중으로 달아나게 되면 그자는 바로 그 체면을 상하게 되고, 그리 되면 다시는 아랫사람을 다스리거나 부릴 수 없게 된다. 유방은 지게 되더라도 반드시 패군을 수습해 과인에게 맞서는 시늉이라도 낼 것이다. 우두머리 된 체면을 지켜야 하기로는 유방이 대장군으로 세웠다는 한신이란 허풍선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머리 없이 떨어져 나와 허둥대는 동쪽의 적을 치고 한숨을 돌린 뒤에 남쪽으로 달려가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

패왕이 그렇게 잘라 말하고 내처 군사를 동쪽으로 몰았다. 한참을 내달으니 해가 뉘엿해졌다. 종리매가 다시 패왕에게 걱정스레 말했다.

“저희 장졸들은 간밤을 새우다시피 유성(留城)에서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거기다가 오늘 종일 힘든 싸움을 한 터라 이제 몹시 지쳐 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더운 저녁이라도 지어먹이고 잠시 쉬게 한 뒤에 적을 뒤쫓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치고 주려 있기는 소성(蕭城)에서 과인을 따라온 장졸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닷새 천리 길을 내달으며 대여섯 번이나 크고 작은 싸움을 치른 데다, 오늘은 점심조차 주먹밥과 찬물로 때우고 세 번이나 성벽을 기어올랐으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전기(戰機)의 엄중함이 우리에게 쉴 틈을 주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지금 그물 코 한 뜸을 놓치면 다음에는 열뜸을 고쳐 떠야 한다. 사수(泗水)와 곡수(穀水)가 앞을 가로막아 저들이 허둥대고 있을 때 들이쳐 오늘밤 안으로 동쪽의 싸움을 결정지어야 한다.”

이긴 자의 여유일까, 패왕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소상히 까닭까지 들려주며 동쪽으로 군사를 휘몰아 갔다.

그때 사수와 곡수 물가의 제후군 형편은 정말로 패왕이 헤아린 대로였다.

원래 팽성 북문을 지키던 제후군의 주력은 역상과 근흡이 이끄는 한군(漢軍)과 한왕(韓王) 신(信), 은왕(殷王) 사마앙(司馬앙) 등의 제후 왕이 이끌던 군사들이었다. 그런데 역상과 근흡이 이끌던 군사와 더불어 한왕에게로 불려가고, 다시 성 밖에서는 환초가 이끄는 초나라 군사가 종리매의 대군에 더해지자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저희끼리만 남게 된 제후군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왕이 몰래 남문으로 빠져 나갔다는 소문이 들리고, 종리매와 환초가 공을 다투며 북문을 치고 들자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북문을 지키던 제후군은 대장군 한신의 명을 기억해서라기보다는 아무도 막는 자가 없어 동문으로 빠져 나갔다. 다만 눈치 빠른 한왕 신만이 장졸 몇과 함께 한군의 주력을 찾아 슬며시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을 뿐이었다.

급하게 따라붙는 초나라 군사가 없는데도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달아나던 제후군은 사수와 곡수가 만나는 곳에서 동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다른 제후군을 만났다. 이름이 제후군이지 실은 힘깨나 쓰는 토호들이나 전리품을 노려 한왕을 따라붙은 초적(草賊)과 유민군이 어우러져 만든 잡군(雜軍)이었다. 그들은 멀리 하상(下相)까지 노략질을 갔다가 패왕이 돌아오고 있다는 심상찮은 소문에 놀라 되돌아온 길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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