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YS ‘쌀개방’ 사과

  • 입력 2004년 12월 8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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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동안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1993년 12월 9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고개를 숙였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단이 ‘쌀 개방 불가’를 공언하며 스위스 제네바로 떠난 지 7일째 되는 날이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UR는 피할 수 없는 대세였다. 새 자유무역 질서를 세우자는 이 프로젝트는 1986년 시작돼 세계 116개국이 참여했다. 농산물 시장 개방은 이 그룹에 동참하기 위한 전제였다.

하지만 한민족의 쌀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동남아산 ‘안남미’가 들어온 1900년대에도 사람들은 “외국 쌀 먹인 자식은 어미 애비도 몰라본다”며 반발하지 않았던가.

정치인 김영삼은 이런 심리를 꿰뚫었다. 1992년 그의 대선공약은 ‘대통령 직을 걸고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는 것. 이후 쌀 개방은 ‘공론화돼선 안 될’ 이슈가 됐고 개방의 불가피성을 논한 관료와 학자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마지막 협상이 진행될 때조차 대통령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개방 여부를 묻는 질문에 “클린턴과 쌀 얘기는 한 적 없다”는 엉뚱한 답변만 내놨다. 그 사이 협상단이 전해오는 소식은 기대와 사뭇 달랐다.

협상단장인 허신행(許信行) 농림부 장관은 미국 농림장관에게 농민시위 사진을 보여주며 “미국 농민 1만5000명과 한국 농민 600만 명 중 누가 더 보호돼야 하겠느냐”고 호소했다. 그러나 국익을 앞세운 통상협상에서 ‘감성 논리’는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결국 쌀 개방은 ‘10년간 관세화를 유예하되 국내 소비량의 4%까지 점진적으로 수입을 늘릴 것’으로 타결됐다. 전문가들은 최선의 결과라고 평했지만 농민들은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관세화 유예기간이 끝나는 올해, 또다시 쌀 협상이 농민의 애를 태우고 있다. 수입물량이 늘어날 것은 확실하고, 수입쌀이 슈퍼에서 버젓이 판매될 가능성도 크다고 하니 착잡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미리 대책이라도 세워 줄 것이지….” 11년 전의 절규가 귓등을 때린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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