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연암의 충고

  • 입력 2004년 11월 24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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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이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그 흐름을 교란하지 말라고 경계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상인이란 싼 곳의 물건을 가져와 비싼 곳에다 파는 존재이며, 나라와 백성은 그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지금 이 명령(쌀가격 억제 및 매점매석 금지)을 시행한다면 서울의 상인들은 장차 곡물을 다른 데로 옮겨 가 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울의 식량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 명령을 결코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장주의자의 주장처럼 보이는 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이 한성부의 종5품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글이다.

요즘의 부동산 투기처럼 당시 쌀 투기가 극성이었던 모양이다. 흉년이 들어 곡물 값이 크게 오르자 곡물상들이 서울로 몰려들고 부자들은 저마다 곡물을 사들여 값이 폭등했다. 연암의 차남인 박종채는 아버지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에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시중의 곡물가격을 억제하고 매점매석을 엄히 다스리자는 주장이 많았고 당시 재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연암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거듭된 흉년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연암의 차남은 “그 후 나는 나라에서 매점매석을 막는 경우도 보았고 곡물가를 억제하거나 조종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때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서울에서 쌀이나 석유를 매점매석하는 일이나 투기가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현 정부가 벌이고 있는 부동산 투기 대책과 뒤틀어진 부동산 시장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집이 팔리지 않아 이사를 못 하는가 하면 머지않아 집값이 다시 오를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규제와 허가, 그리고 과중한 세금으로 대응한 결과는 가격을 조절하는 시장기능의 마비다. 이를 연암은 “농민과 수공업자가 모두 곤궁해지고 백성들은 살아갈 바탕을 잃게 된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혁명기의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는 “모든 프랑스 아동은 우유를 마실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고 우유 가격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우유 공급이 줄었고 우유 가격은 치솟았다. 계속되는 규제에 우유 값은 폭등했고 프랑스 어린이들은 우유를 먹을 수 없었다.

경제 정책 책임자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시라. 세금으로 거래를 막고 규제로 투자를 가로막는 일을 하면서 경제를 살릴 아이디어를 구한들 무슨 방법이 나올까.

정부가 경제를 살릴 아이디어를 찾는데도 열린우리당에 있는 경제전문가들은 말문을 닫았다는 후문이다. 경제부총리와 경제장관을 지낸 인사들이 경제논리에 따라 소신 있게 말하면 ‘배신자’로 찍힐까 봐 아예 외면한다는 것이다.

내년 경제는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실업난이 더 심해지고 감원 바람이 예고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제원리에 어긋나는 규제와 세금을 더 강화할 수단만을 찾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연암의 충고를 받아 줄 만한 재상이 없는 탓인가 보다.

박영균 경제부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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