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이념의 폭력, 언어의 폭력

  • 입력 2004년 9월 22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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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가 세간의 화두다. 앞날이 많지 않은 사람도 과거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독일에서 공부하던 40년 전의 일이다. 젊음의 객기였을까. 빅토르 프란클 교수의 아우슈비츠수용소 체험기를 서울의 대학 시절에 읽었던 나는 히틀러 제3제국의 만행을 저지른 독일인을 곧잘 싸잡아 비난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늙은 교사와 논쟁을 한 다음 나는 더 이상 그러한 비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유대인은 독일인과는 피가 다른, 인류의 적이라는 ‘지도자’의 말을 어리석게도 맹신했다. 그러나 당신들은 같은 피의 동족끼리 왜 한국전쟁 중 그토록 많은 인명을 무참히 학살했단 말이냐.”

▼‘유대인’ ‘빨갱이’… 말의 비극▼

나는 어떤 답변도, 변론도 할 수 없었다. 전중(戰中) 세대의 우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6·25전쟁 중 엄청나게 많은 동족을 오직 ‘빨갱이’ 또는 ‘반동분자’라는 이념적 잣대만으로 무참히 살해한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 괴테 베토벤과 같은 인류 문화의 자랑을 내놓은 독일이 어찌 나치시대와 같은 만행을 저지를 수가 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후 그 난문을 해명하려는 수많은 학문 연구가 있었다. 세계 학계를 한동안 풍미한 ‘일반의미론’도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활성화됐다.

가령 우리는 “사람은 죽는다”고 말을 한다. 그건 누구는 죽고 누구는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에선 이처럼 ‘모든’이 생략된 채 사실을 총칭(總稱)하는 것이 관례다. 우리는 자기가 접촉한 오직 몇 사람의 X지방인 혹은 Y국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X지방의 누구는 간사하다” “Y국의 누구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느낀다. 그러나 “X지방 사람은 간사하다” 혹은 “Y국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모든 X지방인, 모든 Y국인이 그렇다는 뜻이 된다.

어느 곳에나 ‘믿을 수 없는, 상종 못할 사람’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갖는 ‘총칭성’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매사에 철저하다는 독일인들에게 ‘지도자’가 “유대인은…”이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었을 때 그 소름 끼치는 결과를 우리는 2차대전 중에 경험했다. 6·25전쟁 중엔 우리도 ‘빨갱이’ 또는 ‘반동분자’라는 딱지만으로 수많은 동족을 동족의 손으로 학살했다.

일반의미론이 가르쳐 주는 일상 언어의 또 다른 관습은 모든 것을 우리는 선악, 대소, 냉온 등 2분법으로 흔히 표현한다는 것이다. 현실에는 크고 작은 두 가치 사이에 무한히 많은 수치가 있음에도 우리는 대소, 다과(多寡) 등 2분법적 표현을 쓴다. 그것을 ‘이치적(二値的)’ 사고라 한다. 인생은 결코 100% 행복하지도, 100% 불행하지도 않은데 우리는 행불행으로 나누고, 인간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어중간의 존재인데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람을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나눈다. 그런 이치적 사고가 마침내 ‘죽일 놈’ ‘살릴 놈’이라는 ‘살생부적 발상’으로 전개된 것이 6·25전쟁 중 좌우익에 의한 대량의 양민 학살을 낳은 것이다.

▼‘과거사’싸움 모두가 패자▼

21세기 초의 오늘날,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화두 삼아 공론권이 분열되고 남남갈등이 심화된 현실을 지켜보는 마음은 답답하다. 6·25전쟁의 비극을 체험한 ‘원로’들조차 분열 갈등을 중재하기보다 되레 부채질하는 것 같아 보기 민망스럽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그처럼 고귀한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 6·25전쟁은 무엇을 얻었다는 말인가?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레몽 아롱은 한국전쟁을 보고 쓴 명저 ‘무한전쟁’에서 “현대전에선 승자도 패자도 없다. 전쟁을 치르면 모두가 패자가 되고 승자란 오직 전쟁을 피한 자”라고 적었다. 6·25전쟁에선 남북한이 다 패자였다. 승자는 전쟁을 피한 일본이었다. 오늘의 남남 갈등에서는 좌우, 보혁 모두가 패자가 되고 그걸 피한 북한이 승자가 될 게 분명하다.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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