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5년 9월22일: 시인 김광섭 출생

  • 입력 2004년 9월 10일 11시 41분


코멘트

하나의 생존자(生存者)로 태어나 여기 누워 있나니

한 칸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氣流)의 파동(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신경(神經)도 없는 밤

시계(時計)야 기이(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고독(고독)'-일부>

어찌할 수 없는 낭만주의자이면서도 상실의 고뇌를 현실과 역사 속에서 보듬었던 관념의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국치(國恥)의 해인 1905년 9월22일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일제 식민지 시대는 불의로 가득 찬 불가항력적인 세계였으며 타협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의 초기 시 '고독(孤獨)'은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단한 고기와도 같>은, 우수와 비애가 다함이 없는 내면공간을 보여준다.

<신경(神經)도 없는 밤/ 시계(時計)야 기이(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와 같은 시구에서 보여지 듯, 1938년 선보인 그의 처녀시집 '동경'은 주지적 경향과 관념적 표현 속에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 ♣ ♣

도쿄 유학을 마치고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산은 1941년 2월21일 아침,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인 형사에 의해 체포된다.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비난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는 종로유치장에 수감돼 100여일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 공고문(비행기 태우기)을 돌아가면서 당해야했고, 취조를 받던 중 그가 일본 유학시절 쓴 일기에서 '일본 놈들, 조선 사람의 피를 짜서 소다수에 타 먹어라'란 대목이 발견돼 실형을 선고받는다.

1949년 발간된 두 번째 시집 '마음'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은 3년8개월 동안의 영어생활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세 번째 시집 '해바라기'(1957년)로 이어지는 그의 중기 시는 초기 시에 비해 훨씬 깊고 부드럽고 넉넉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격렬한 자기부정 대신 따뜻한 동경과 자기위안을 담아 순일(純一)한 서정의 편린마저 엿보이게 한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마음'-일부>

♣ ♣ ♣

이산은 1965년 4월22일 서울운동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일주일 만에 의식을 되찾는다. 그는 이후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생활을 통해 생명의식과 인간존재에 대한 내밀한 성찰에 이르게 되고, 후기 시는 공동체적 삶과 역사적 현실을 뜨겁게 끌어안게 된다.

그것은 초기 시의 추상성과 관념성의 옷을 벗어버리고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모국어를 재발견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의 일치,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적 상상력의 접목은 그의 시 '설경'에서 <풍년 보리가 눈 속에서 피리를 불어요>와 같은 절창을 낳는다.

다형(茶兄) 김현승과 함께 우리 현대시사에서 독보적인 관념의 시인으로 꼽히는 이산. 다형이 '고독'에서 출발해 '절대 고독' 속으로 침잠했다면 그는 고독의 껍질을 깨고 나와 현실과 역사의 지층 위에 섰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이산의 시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의 시는 그가 즐겨 노래하는, 그리고 그의 아호((怡山)와도 같이 '저 산' 너머 어딘가, 쉽사리 안 잡히게, 넓고 깊고 또 어진 데가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