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왕의 정부’…베갯머리에서 유럽역사가 바뀌었다

  • 입력 2004년 8월 13일 17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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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샤를 7세의 정부 아그네스 소렐의 초상화. 우유부단한 샤를 7세를 설득해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영국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낸 소렐은 왕의 정부(情婦)로서 최초의 초상화를 남겼다. 왕의 정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진제공 생각의 나무
프랑스 샤를 7세의 정부 아그네스 소렐의 초상화. 우유부단한 샤를 7세를 설득해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영국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낸 소렐은 왕의 정부(情婦)로서 최초의 초상화를 남겼다. 왕의 정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진제공 생각의 나무
◇왕의 정부/엘리노어 허먼 지음 박아람 옮김/414쪽 1만9500원 생각의 나무

일찍이 동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요, 군주무치(君主無恥)라. 본디 영웅은 미색을 즐기고, 임금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최고 권력자의 성적 욕망 충족을 합리화하는 논리였다. 그렇지만 동양의 폭군 곁에는 늘 요녀(妖女)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중국 하나라의 걸왕 곁에는 말희가 있었고 은나라의 주왕 곁에는 달기가 있었다. 조선시대 연산군 곁에는 장녹수, 광해군 곁에는 김개시가 있었다.

미색을 탐한 게 폭군뿐일까. 세종은 조선조 임금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낳았고 성종은 폐비 윤씨, 숙종은 장희빈의 미색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TV사극들이 구중궁궐의 역사를 여자들의 치마폭 속에 넣어버렸다는 비판은 1차원적이다. 정작 문제는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여성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여성을 문제적 존재로 바라보는 남성 중심적 시각의 폭력성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서양의 역사는 어떻게 다를까. 유럽왕실의 침실을 장악한 정부(情婦)들이 어떻게 국사에 개입했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책은 어떤 한국의 TV사극보다 쇼킹한 베갯머리송사로 가득하다.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정부였던 앨리스 페레스는 왕을 유혹해 국고를 탕진시키며 10년 만에 영국 최대의 지주가 되고도 왕이 죽자마자 그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가는 탐욕의 화신이었다. 포르투갈의 요한 5세는 수녀원장과 훗날 대주교가 되는 아들을 낳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정부였던 마담 드 몽테스팡이 몰래 그의 식사에 뿌린 두꺼비의 배설물과 갓난아기의 내장으로 만든 사랑의 묘약을 먹었다.

유럽에서 최대 호색한으로 꼽혔던 영국의 찰스 2세의 정부 캐슬마인 백작부인은 매년 10만파운드의 돈을 받고도 모자라 1666년 영국 해군의 급료도 못주는 상황에서 찰스 2세에게 다시 3만파운드의 빚을 갚도록 해 국민적 반감을 샀다.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왕의 정부였던 로라 몬테즈 요세프 슈틸러는 왕으로부터 뜯어낸 돈으로 방탕한 남성편력을 벌여 백성들의 폭동을 유발했고, 이는 결국 혁명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쁜 일에는 여자가 끼어있다’는 식의 남성 중심적 윤리관을 적용하지 않는다. 왕 스스로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유럽 왕실의 구조적 요인이 왜곡된 욕망을 낳았다는 점과 결국 남자들 욕망의 대체제일 수밖에 없었던 ‘왕의 정부’의 본질적 비극성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6세기부터 아예 ‘왕의 공식정부’를 뜻하는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en-titre)’시대가 열리면서 이들이 왕실에 대한 대중의 애증을 투영하는 역할도 수행했음을 포착한 점이 돋보인다.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지극한 아내 사랑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를 위해 메트레상티트르를 임명해야 했다. 왕의 욕망충족을 공식화한 메트레상티트르 제도가 반대로 대중의 욕망을 위해 왕의 욕망을 억압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대중적 선망에 가까이 다가선 다이애나를 아내로 택하면서 자신이 욕망한 카밀라 파커 볼스를 정부로 감춰야 했던 점이야말로 그런 전도현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원제 ‘Sex with the King’.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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