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6년 北 ‘남로당계 숙청’ 발표

  • 입력 2004년 8월 6일 18시 43분


코멘트
“그 리론가(理論家) 어떻게 됐어?”

1956년 7월 19일. 소련과 동유럽 순방길에 올랐던 김일성은 평양에서 정변(政變)의 낌새를 맡고 급거 귀환했다.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자마자 그는 박헌영의 안부(?)부터 물었다.

김일성 반세기 집권사에 최대 위기라는 ‘8월 종파사건’.

그해 2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으로 촉발된 연안파의 반(反)김일성 축출기도는 그러나 김의 반격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내무성 지하 감옥에 수감돼 있던 박헌영을 “즉시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김은 연안파가 남로당계와 손을 잡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김일성의 남로당 ‘토벌(討伐)’은 6·25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나흘간 진행된 군사재판은 이승엽 이강국 등 남로당 거물들을 미군 스파이로 몰았다. 스탈린식 날조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고국을 찾아 월북했던 임화도 이때 처형된다.

평양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지식인들은 좌익에 더할 수 없는 환멸을 느꼈다.

그 이태 뒤에는 박헌영에게 사형이 언도된다. 미제 간첩 및 일제 밀정(密偵) 혐의라니.

박헌영과 김일성은 정치적 라이벌이었다.최대의 정적(政敵)이었다. 두 사람의 노선갈등은 전쟁을 거치면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으로 비화되었다.

박의 패배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주국 소련은 일찌감치 위성국가(?)의 지도자로 김일성을 점지했다. 스탈린은 박헌영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꺼렸다.

박이 서울에 둥지를 튼 것이 최대 실수였다. 미군정의 혹독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월북했을 때 그는 단지 ‘식객(食客)’에 불과했으니. 그는 6·25전쟁을 통해 반전을 노렸으나 ‘휴전’의 공(功)은 김일성에게, 그 과(過)는 박헌영에게 돌아갔다.

‘조선의 레닌’ 박헌영.

그는 역사의 미아(迷兒)였다. 북에서는 미제의 앞잡이요, 남에서는 골수 빨갱이였다. 문중의 족보에서조차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그러나 이제는 ‘은밀하고 공포스럽게’ 유지되어온 박헌영의 기억을 역사로 부활시킬 때도 되지 않았을까.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 등이 11년간의 노작인 ‘이정 박헌영 전집’(전 9권)을 펴낸 것은 그런 취지에서다.

‘역사의 화해(和解)’를 위해!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