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독서휴가

  • 입력 2004년 8월 6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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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만 해도 요즘처럼 방학에도 과외공부로 날을 새우지는 않았다. 책 좀 읽는다는 학생은 초등학교 시절 명작 동화를 떼고, 중고교 때 방학을 이용해 국내외 명작 소설과 고전(古典)을 독파하곤 했다. 50∼100권짜리 전집을 완독하려면 한두 달의 방학은 결코 길지 않았다. 무슨 어려운 책을 독파했다는 것이 친구들간의 자랑거리요, 여학생들의 조숙한 독서가 동년배 남학생들을 주눅들게 하던 시절이었다.

▷은사 한 분은 청년 시절 방학 때마다 시골의 고향집에 파묻혀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했던 일화를 소개하곤 했다. 방 한가운데 병풍을 턱하니 펴놓고 아침 일찍 병풍 뒤로 들어가 종일 책만 읽었다는 것이다. 칠순이 넘은 선생이 여전히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식견으로 제자들을 압도하는 것은 이때의 독서가 원천(源泉)일 것이다. 선생이 읽은 책과 문장(文章)의 절반에라도 이르기를 앙망했으나 30년이 지나도록 발끝에도 이르지 못한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왕들은 ‘독서휴가’로 국정을 이끌었다. 세종대왕은 촉망받는 젊은 학자들에게 재충전을 위한 독서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실시, 성삼문 박팽년 등을 절로 보내 글을 읽게 했다. 독서에 필요한 비용은 전액 국비로 지급토록 했고 수시로 음식을 내려 격려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고위 신하들에게 3년에 한 번꼴로 한달가량의 유급 독서휴가를 주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 5편을 정독한 뒤 독후감을 제출하는 ‘셰익스피어 버케이션(Shakespeare Vacation)’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연암 박지원의 산문집과 국민 중심의 정책적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번역서를 들고 관저에서 여름휴가 중이라니 다행이다.

▷일년에 고작 서너 권의 화제작을 읽는 데 그치거나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들척이는 것으로는 결코 독서의 희열을 맛볼 수 없다. 최고의 독서 시즌은 놀기 좋고 먹을 것 많은 가을이 아니라 방학과 휴가철이라는 것이 서점가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하루 한권씩 책을 뗄 요량으로 평소 읽고 싶던 책을 모아 계곡과 산사(山寺)에서 이를 독파한다면 그야말로 최고 피서가 아닌가. 단행본보다는 전집, 난독보다는 작가별 분야별로 집중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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