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자유의 미래’…민주주의 지나치면 '자유' 죽는다

  • 입력 2004년 8월 6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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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다양한 민중들을 이끌고 있는 리더가 ‘자유의 여신’이라는 점은 민주주의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저자의 인식과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다양한 민중들을 이끌고 있는 리더가 ‘자유의 여신’이라는 점은 민주주의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저자의 인식과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자유의 미래/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나상원·이규정 옮김/330쪽 1만8000원 민음사

이 책은 거창한 제목만큼 도전적인 문제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 도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민주주의의 ‘만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의 과잉’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지나친 민주주의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인민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가 늘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의 상태를 “민주주의는 번성하지만 자유는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한다. 민주주의는 달콤한 유혹의 노래처럼 듣기에는 좋으나, 지나치게 되면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고 근시안적인 정책을 남발하게 돼 결국 자유의 적(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가 책의 맨 앞에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의 충고를 받아들여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듯이, 현대인이 자신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 민주주의의 맹신에 빠지지 않는다면 대중의 변덕에 좌우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에게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비록 저자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균형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가 민주주의보다 개인의 자유에 보다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자유가 민주주의를 이끌며, 그 반대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봐도 그렇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자유권은 사유 재산권, 그리고 언론·집회·종교의 자유로 나타나며, 법치와 권력분립은 그 효율적인 보장을 위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이런 기반이 마련된 다음에야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그 주장에는 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함축돼 있다.

그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양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모델은 칠레,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국이다. 이들 나라의 정권은 권위주의적이었지만 서서히 경제발전과 중산층의 형성을 이루고, 법치질서의 바탕을 마련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조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층은 틀림없이 저자의 주장에 박수를 칠 것이다.

저자는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같은 보수 논객처럼 서구 중심의 자유민주주의가 인류의 최종적인 정치이념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가 후쿠야마와 다른 점은 성급히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언하지 않고, 미국 민주주의의 병폐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민주주의를 규제하고, 자유의 회복을 위해 그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소수 엘리트에 의한 위임정치이다. 그는 전문가가 대중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통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책은 미국에서 즉각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과연 한국에서도 폭넓게 수용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소수 엘리트의 전횡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의 책은 근대성 체제에서 성스러운 후광에 싸여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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