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카페][책의향기]‘문자제국쇠망약사’ 쓴 이남호 교수

  • 입력 2004년 8월 6일 17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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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기기자
강병기기자
“본디 제국이 무너지면 새로운 제국이 수립될 때까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에너지가 힘을 얻기 마련입니다. 최근 한국사회의 야만성과 원시성은 문자의 제국이 무너지고 전자의 제국이 들어서는 과도기의 혼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문자제국쇠망약사’(생각의 나무)의 저자 고려대 이남호 교수(48·국어교육학과)의 목소리에는 오랜 고민을 씻어버린 시원함이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오랜 세월 고민했던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한 깨달음이 들어 있어요. 포스트모더니즘의 범람, 서사의 와해와 문학의 쇠퇴, 인문학의 몰락과 책의 변화, 사회 각 분야에서의 힘과 권위의 이동 등 이해하기 힘들었던 수많은 현상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 있는 것은 바로 문자에서 전자로의 매체변화였습니다.”

그에게 깨달음의 죽비를 후려친 것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고 외쳤던 마셜 맥루한이었다.

“문자는 모든 문제를 기-승-전-결의 선형적 논리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은 인체의 오감 중 시각 중심의 사고이고 남성중심주의적 사유체계를 형성케 합니다. 오이디푸스가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시각의 상실이 거세와 같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자매체는 시각의 압도를 물리치고 다른 감각을 해방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초 신경적이고 비논리적인 비약이 이뤄집니다.”

그러나 전자시대의 미래에 대한 그의 전망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다. 만화나 영화가 지난 시대 문학의 진정성을 담아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자매체의 진정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체의 속성상 그 무게가 가벼워지고 밀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영화만 보아도 잘 만든 영화는 많지만 좋은 영화는 드물지 않습니까.”

‘쓰러져가는 문학의 고목 아래서 서성이며 전자제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그의 고백은 결국 패배는 인정하되 승복은 할 수 없다는 낭만적 제스처다. 이처럼 그를 승복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안 그래도 문자문화의 전통이 취약한 상황에서 가장 급속하게 전자제국에 편입되고 있는 한국적 현실이다.

“한국사회는 ‘근대화는 뒤졌어도 정보화는 앞서자’는 모토 아래 전자매체의 문화를 가장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자매체의 권위와 질서가 채 형성되기도 전에 야만성과 원시성의 침략에 노출된 것과 같은 거죠.”

순간 노도처럼 밀려오는 오랑캐를 지켜보며 장탄식을 터뜨리는 유생(儒生)의 모습이 그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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