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풀의 저항, 재단사의 항변

  • 입력 2004년 8월 3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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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관료들은 흔히 자신을 풀에 비유한다. 김수영 시인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고 노래한, 바람이 채 닿기도 전에 누워버리는 풀. 그들은 “우리는 손님이 맞춤옷에 단추를 두 개 달라면 두 개 달고, 세 개 달라면 세 개 다는 재단사”라고도 말한다. 경제 관료는 정치권력의 퇴장과 등장에 따라 정책지향이 어떻게 바뀌든 살아있는 권력에 순응해 왔다. ‘선출된 권력’에 대한 복종은 ‘임명된 권력’의 숙명이려니 해 왔다. 처세의 상식으로도 인사권과 사정(司正)이라는 칼을 쥔 정치권력을 거스르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이런 까닭에 경제관료의 수장(首將)격인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최근 쏟아낸 말들은 예사롭지 않다. ‘바람에 저항하는 풀’ ‘손님의 주문에 고개를 내젓는 재단사’의 모습이다. 파장이 심상치 않다고 감지했던지 이 부총리는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반어법(反語法)”이라고 에둘러 말했지만 어디 그런가.

대통령이 “경제는 좋아진다. 올해 5%대를 시작으로 임기 동안 매년 6% 이상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장담한 게 불과 두 달 전이다. 대통령은 야당 기업 언론을 지칭하며 “불안을 증폭시키고 위기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못질까지 했다. 그런데 경제부총리가 우리 경제를 병 가운데 가장 고치기 어렵다는 우울증과 무력증에 비유하고 나선 것이다.

이 부총리는 또 “요즘은 한국이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등 여당의 구체적 정책들을 방증으로 열거했다. 열린우리당이 시장경제원리에 반(反)하는 정책을 내놓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국민과 기업들은 경제정책 혼선에 어지럼증을 느껴왔다. 대통령이 분양원가 공개는 시장원리에 반한다고 하는데도 여당은 이 말을 밟고 밀어붙였다. 대통령과 청와대 고위참모는 단기부양책을 안 쓴다고 해 왔지만 추가경정예산이 여당 주도로 통과됐다.

청와대, 여당, 행정부는 경제정책을 끌고 가는 세 기관차다. 이 부총리의 말을 통해 당-정-청이 경제상황과 경제운용원리에 대해 제각각 딴 생각을 하고 있음이 확연해진 판에 정책의 일관성과 투명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안마다 당-정-청 3자의 속내를 다 확인하지 않고는 정책이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갈래다. 이 부총리를 바꾸는 방법이 그 하나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맛이 쓰더라도 이 부총리의 항변을 삼켜야 한다. 특히 정권 핵심부의 386이나 475세대들은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경제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하고 정치하는 법만 배운’ 한계를 자인하고 경제 과외공부라도 해야 한다.

부산의 한 유명 양복점 사장은 옷을 잘 만들려면 먼저 사람 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네 목욕탕에서 3년 반 동안 때밀이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당-청이 옷을 직접 만들 듯 세세한 경제정책까지 주무를 생각이 아니라면 이런 지극정성은 없어도 괜찮다. 하지만 재단사 입에서 “손님, 주문대로는 옷을 만들 수 없는데요”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은 경제하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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