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6년 윤심덕 현해탄서 투신

  • 입력 2004년 8월 3일 19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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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玄海灘)은 ‘시린’ 바다다. 애환의 바다다.

이름 그대로 깊고 그윽하지만(玄), 물살은 급하고 암초 또한 많아 위험한(灘) 바다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천재 극작가 김우진은 29세의 짧은 생애를 그 시린 물빛 위에 접었다. 훨훨 이승의 인연을 끊었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동이 틀 무렵이었다.

그들의 투신자살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일대 지진이었다.

기성세대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신문은 “전도 다망(多望)한 청춘남녀의 경솔한 최후”라고 점잖게 나무랐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정(世情)은 무심했다. 1920년대 조선사회를 휘감았던 자유연애 풍조에 대한 반감도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은 이 나라 근대예술의 여명기에 연극과 음악에서 빛나는 존재였다. 시대를 치열하게 고뇌하던 선각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비련의 주인공’으로 묻히고 말았으니!

우리나라 근대 공연예술의 터를 닦았던 김우진.

호남 대지주의 아들은 니체와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했고, 스웨덴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 기법을 도입했다. 우리 연극은 비로소 ‘낡은 신파’를 털어낼 수 있었다.

그는 사회비평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울혈(鬱血)을 거침없이 뱉어냈다. “이광수류(類)의 문학을 매장하라!”

윤심덕은 언제나 대중의 관심 속에 있었다.

동양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몸맵시를 지녔던 그는 성격 또한 쾌활했다. 어지간히 존대를 아끼던 ‘왈패’였다.

1923년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돌아온 윤심덕은 숱한 염문에 시달린다.

장안의 갑부 이영문과의 스캔들은 단연 화제였다. 도쿄 유학시절 그와 사랑을 맹세했던 김우진이 절연을 선언한 게 이때다. 그는 처자가 있는 몸이었으되.

윤심덕은 상심에 젖어 1년여를 만주에서 떠돌았다. 1925년 심기일전한 그는 ‘토월회’의 연극무대에 섰으나 재기의 몸부림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어찌어찌 두 사람이 도쿄에서 재회했을 때 윤심덕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그는 이바노비치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직접 가사를 붙였다. 그리고 ‘사(死)의 찬미’를 노래한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드냐….”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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