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앞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라

  • 입력 2004년 7월 27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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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이 한국처럼 5명이나 되는 나라는 흔치 않다. 미국도 4명에 불과하고 프랑스는 단 1명뿐이다. 정치 후진국의 경우엔 제 나라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전직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드물다.

새삼 한국 민주화의 놀랄 만한 성취를 되뇌려는 게 아니다. 성패와 공과를 떠나 한 시대를 이끈 전직 대통령의 국정 경험 또한 중요한 국가자산이라는 점을 떠올리다 보니 다른 나라와의 비교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위기의 본질이 드러났다

살아 있는 전직 총리의 수는 더욱 기록적이다. 한국처럼 21명이나 되는 나라는 아마 지구상에 없을 듯싶다. 한국의 총리와 격(格)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은 8명, 영국은 4명에 지나지 않고 독일은 단 1명뿐이다.

살아 있는 전직 장관의 수도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 건국 이후 56년 동안에 800여명의 장관이 양산됐으니 하는 말이다. 이런저런 전직 장관급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한국의 국정 경험자 수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국정 능력도 숙성됐을까.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듯이 천만의 말씀이다. 주된 이유는 경험의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집권세력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 드는 게 한국적 특성 중 하나다. 이를 위해 새 집권세력은 으레 구(舊)정권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일부터 했다. 구정권에 대한 단죄도 어김없이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경험이 온전히 전수될 리 만무했다. 그래서 새 정권 초기 국정은 종종 원론수준으로 뒷걸음질하곤 했다. 집권기간의 30%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내내 과거와 싸우는 데 소일한 현 정권이 유독 심한 편이다.

현 정권은 그래도 부족한지 그 대상과 시한을 자꾸 확대하고 있다. 벌써 몇 세대 전의 일까지 들추려 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조선시대 사화(士禍)나 민란까지 재규명하기 위한 입법을 하자고 나설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조만간 과거의 수렁에서 헤어날 가망은 적어 보인다. 2007년 대선까지 과거논쟁으로 날이 지고 샐 가능성이 크다. 못난 후손들이 서로 남의 조상 탓을 하는 식의 여야의 정체성 논쟁은 그 서곡일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거 청산은 수상한 의도보다 인간의 성정(性情)에 반하는 사고방식에 더 큰 위험이 내포돼 있다. “지금 준장 소장은 군부정권에서 지도력을 키워 온 사람들”이라는 한 여당 의원의 매도가 아주 섬뜩하다.

특정 시대에 특정 조직에 몸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부정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모두가 숨죽여야 했던 어둡고 힘든 시절 나름대로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사람들까지도 움츠리게 하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자초한 위기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즉 무리한 과거 청산으로 인한 사회 각 분야의 역행(逆行)과 역류(逆流)가 구성원들의 불안과 불신을 증폭시키고 그것이 총체적 혼란과 갈등을 유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의 ‘당당한’ 훈계가 어쩌면 기막힌 ‘시대의 희화’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거꾸로 되는 세상이니 흉악범이 선량한 시민들을 향해 “똑바로 살아라”고 외쳐도 심상한 일이 돼 버린 것일까?

미래로 나가야 과거도 정리된다

집권세력이 과거를 살피는 ‘뒷문’만 열어 놓으면 통풍이 되지 않아 국정에 순환 장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당장 미래로 통하는 ‘앞문’을 열어젖혀야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과거를 정리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고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과거도 정리된다는 사고로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집권세력이 나라 안에서만 아옹다옹할 게 아니라 밖으로 눈을 돌렸으면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임자에 비해서도 나라밖출입이 뜸하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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