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입시타령은 이제 그만

  • 입력 2004년 7월 23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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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제도가 또 바뀌는 모양이다. 우리 입시제도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바뀌어 온 피곤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정부도 다음달 새 대입제도를 발표할 예정이다. 요즘 중학교 3학년 이하 학부모들의 최대 관심사가 이것이다.

물론 바꿀 필요가 있으면 바꿔야 한다. 하지만 과거 정권들은 교육을 위한 목적보다는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입시제도를 바꾼 전력이 있다. 사람들은 입시제도가 바뀌면 막연한 기대를 갖는다. 사교육비도 줄어들고 대학 가기도 나아질 거라고. 이번에도 이런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입시제도를 바꾸자는 논리는 이렇다. 대학입시제도는 초중고교 교육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 따라서 새 입시제도를 도입하면 교육도 달라질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지난 수십년간 입시제도를 그렇게 여러 번 바꿨으나 교육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 이젠 새 입시제도가 우리 교육을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제는 입시제도에 있었던 게 아니다.

입시제도의 잦은 변경은 교육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교육 실패에 따른 잘못은 입시제도에 떠넘기면 되기 때문에 다른 교육주체들은 면죄부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사를 예로 들어 보자. 국가 예산의 20%가 교육에 투입되고 있다. 없는 나라살림에 나름대로 애를 쓰는 셈이다. 교사 1인당 학생수도 과거 콩나물 교실과 비교하면 많이 줄었다. 그러나 공교육 수준은 여전히 기대 이하에 머물러 있다. 교사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교육여건이 훨씬 열악했던 지난 시절에 교사들은 학생들 진학지도에 참으로 열성적이었다. 가난한 집 자녀들도 이런 스승의 ‘은혜’에 힘입어 대학에 들어가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제 이런 사명감 있는 교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도시 빈곤층이나 농촌 학생들이 명문대를 가지 못하는 게 어찌 모두 가난 탓이고 사교육 탓이며 입시제도 탓인가. 오늘날 학생을 가르치는 본업보다도 정치 투쟁에 더 열을 올리는 일부 교사들은 걸핏하면 시위를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게 현실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그동안 입시제도가 잘못되어서 그리 됐으니 다시 시작해 보자’며 새 입시제도를 내놓는다. 그들에게 입시제도만큼 좋은 핑계는 없다. 반면에 ‘내 탓이오’라며 자책하는 교사나 관리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교육부에 따르면 새 입시제도는 내신 위주가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수능시험의 비중을 줄이거나 폐지하겠다는 뜻과 같다. 구체적으로는 ‘교육 이력철’이라는 새 내신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인데 어떤 형식을 갖추더라도 내신은 내신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내신 위주의 입시가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신은 전국적인 객관성을 갖춰야 전형기준으로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교사들은 학교 내에서는 1등이더라도 전국적인 기준에 미달하는 학생에게 단호하게 낮은 등급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내신 부풀리기’의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한국식 온정주의 아래서는 실현되기 힘든 일이다.

대학입시 문제는 발상을 바꿔야 한다. 대학에 전권(全權)을 주는 것이다. 학생 선발권은 원래 대학의 고유 권한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부는 대학입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 정부가 겉으로는 대학 자율권을 확대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자꾸 입시제도를 바꿔가며 입시에 개입하려는 것은 모순이다.

교육 문제가 안 풀리는 것은 교육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인 탓이다. 자본의 논리, 평가 시스템의 부재, 가족 이기주의, 허영심 같은 불합리한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뒤엉킨 문제를 입시제도로 해결하려 드니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교육 문제에 관한 한 정부는 단숨에 해결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한걸음씩 교육의 기본과 체질을 강화하는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더 이상 입시제도를 희생양으로 내세우지 말라.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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