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반역의 책’…“반역자를 용서하라”

  • 입력 2004년 7월 23일 17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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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각미록’의 공동저자이자 이 책을 중국 전역에 전파한 청나라의 5대 황제 옹정제. -사진제공 이산

‘대의각미록’의 공동저자이자 이 책을 중국 전역에 전파한 청나라의 5대 황제 옹정제. -사진제공 이산

◇반역의 책/조너선 스펜스 지음/이준갑 옮김/376쪽 1만6000원 이산

청(淸) 제국의 중국 지배가 확고해져가던 1728년.

쓰촨·산시성 총독 웨중치의 가마 앞에 편지를 쥔 사내가 들이닥쳤다. 웨중치는 사내를 가둔 뒤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제위를 찬탈한 이적(夷狄·오랑캐)들은 짐승과 같은 종족입니다.…지금 황제는 부모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형제들을 죽인 자로, 아첨에 귀를 기울이며 살인을 즐깁니다.…송과 명나라의 원수를 갚으소서.” 그것은 바로 역모의 제안이었다.

이 책은 역사상 실존했던 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책의 이름은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 옹정제(雍正帝·1678∼1735) 통치하의 청 제국 전역에서 관리와 학생 누구나 암송해야 했던 이 책은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이 수수께끼의 책을 만든 주역들과, 책이 만들어지고 전파되다 소멸되기까지의 전말을 살펴보면서 언어와 금기와 권력, 민심과 통치, 대의와 현실세계 사이의 모순을 해부했다.

● 반역자를 설득하라

웨중치는 반역에 동조하는 것처럼 위장해 며칠 만에 사내의 배후를 캐낼 수 있었다. 주모자는 후난성에 사는 쩡징이라는 선비였다.

쩡징은 결국 체포돼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뒤 놀랍게도 그에게 황제의 편지가 도착했다.

“너는 화(華)와 이(夷) 사이에 군신(君臣)의 의가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동서남북 어디에나 동일한 이(理)와 기(氣)가 있는데, 중화에만 하나의 천지가 있다고 하겠느냐?”

황제는 아버지 강희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형제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행동했는지를 편지와 기록으로 밝혔다. 살인을 즐기기는커녕 정황을 가려 중죄인을 사면했던 사실들도 기록을 들어 설명했다.

쩡징은 충실히 답변을 써 보냈다. 자신의 몽매함에 대한 통탄과 헛된 소문을 전한 자들에 대한 원망이었다. 편지 교환은 열흘 넘게 계속됐다.

● 민심을 설득하라

“쩡징을 풀어주어라.”

황명(皇命)에 대한 대신들의 저항은 극렬했다. 그러나 옹정제 역시 완강했다.

“쩡징은 떠도는 소문만 듣고 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진정 요망한 자는 선조를 조롱하고 흉중에서 요망스러운 말을 만들어낸 자다.”

‘흉중에서 요망스러운 말을 만들어낸 자’란 한 세대 전의 문인 뤼루량(呂留良)을 일컫는 말이었다. 황제는 수사를 통해 역모사건의 가담자가 모두 뤼루량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뤼루량의 글은 이미 서부 일대에 퍼져 있었다.

‘뤼루량의 글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간언에 대해서도 황제는 반대했다. “완벽하게 없앨 수 없을뿐더러, 만일 완벽하게 없앤다면 이번 사건의 근원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황제의 결정은 대담했다. 쩡징과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판단하도록 맡긴 것이었다. ‘대의각미록’은 곧 전국 방방곡곡에 배포됐다.

● 책을 거둬들여라

쩡징 사건이 일어난 지 7년 뒤 옹정제는 세상을 떠났다. 제위에 오른 건륭제는 ‘역도(逆徒)’ 쩡징을 다시 잡아들여 처형했다. 신하들은 ‘대의각미록’에 군주를 비방하는 표현이 가득해 입에 올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예부(禮部)에서는 책을 거둬들여 없애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의각미록’은 민중으로부터 격리됐다.

그러나 7년 동안 책을 암송했던 지식계급이 그 내용을 잊을 리 없었다.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본래 텍스트를 잃어버린 ‘사라진 책’은 엉뚱하게 각색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뤼루량의 손녀가 ‘오랑캐’ 황제를 유혹해 동침한 뒤 칼로 목을 베었다는 전설까지 나돌았다.

과연 현명한 이는 누구였을까. 지배자에 대한 비판을 민심의 발로로 여기고 적극적인 자기해명에 몰두한 옹정제였을까, 아니면 비판 자체를 철저히 금압(禁壓)한 건륭제였을까.

역사에 가정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건륭제와 이후의 지배자들은 한족(漢族)의 반청(反淸)감정을 꺾지 못했고, 한 세기 뒤 외세의 침략 앞에서 중국은 분열된 채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원제 ‘Treason by the Book’(2001년).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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